- feat. 이카로스
2019년의 마지막 이틀, <블랙독>을 보면서 계속 한숨이 나왔어요. 현실감이 떨어지는 설정이 많아서 답답했지만, '학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들었어요. 우선 가장 심각한 '심화반'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고 싶네요.
5, 6화에서는,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서울대를 뜻하는 '한국대'에 한 명이라도 더 보내기 위해서, 대치고에서 심화반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묘사되었지요. 5화에서 한국대에 방문해서 입학사정관을 만났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고, 작년 성적이 뒤집어지면서 상위권 학부모들의 신뢰를 잃어버린 배경도 작용했습니다. 박성순(라미란) 진학부장이 교장, 교감과 부장교사들이 모이는 기획회의 때 말했듯이, 교육청이 심화반 편성을 금지한 이유는 '대놓고 공부 잘 하는 아이들만 학교에서 밀어주지 말라'는 것인데, 주변의 다른 학교들도 알게 모르게 상위권 아이들을 관리하고 있다며 심화반 도입을 결정합니다. 그것도 기획회의에서 다수결로요. ㅠ.ㅠ
전체 교사회의에서는 이미 결정된 심화반의 선정 기준만 형식적인 거수로 통과시키지요. 한국대 입사관이 말했듯이, 대치고의 문제는 아이들이 아니라 비민주적인 학교 시스템과 소통하며 협력하지 않는 교사문화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는 장면이었어요. 교사들이 학교의 주인으로 참여하면서 전문성을 키우고 창의성을 발휘할 수 없는 벽들이 너무나 많은 학교였습니다. 교과, 학년, 부서의 벽에 둘러쌓여 교사 한 명 한 명이 자신을 성찰하고 발전할 기회가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20세기 학교의 전형이지요.
아직도 많은 고등학교가 변형된 심화반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했고 올바른 가치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으로서의 학교를 포기하게 만드는 구조적인 문제점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함께 고민하고 논의해야 할 문제가 많은데도, '20명의 상위권 아이들'에게 혜택을 몰아주기 위한 심화반 때문에 저렇게 투표를 하고 있으니, 대치고의 교사가 되어 벌떡 일어나 싸우고 싶었어요.
소수의 잘 하는 아이를 더 잘 하게 만드는 노력의 10분의 1이라도, 모든 아이들이 공부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편하게 대화하고 자연스럽게 협력할 수 있는 수업과 교실문화를 만드는 데 쏟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요? 그것이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배려, 협력, 나눔, 갈등해결의 가치를 체험할 수 없으니 입시 성적도 좋을 수가 없습니다. 나 혼자만 잘 해서, 명문대를 갔다 해도, 무한 경쟁의 미로에 갇혀버린 그 아이의 인생만 더 힘들어질 뿐이겠지요.
대치고의 특별 관리 동아리의 선발 기준을 봐도 그렇습니다. 전교 20등 이내 우선 선발, 진학부 특별 입시 상담권, 인기 방과후 수업 우선 수강권, 자율학습실 지정석 제공인데요, '우선' '특별', '지정석' 이런 것들의 맛을 10대 때 알아버리면, 다른 아이들이 얼마나 루저 같고 하찮아 보이겠어요. 자신이 받은 혜택은 당연한 것이고, 다른 아이들의 불행은 조롱거리가 돼버리고요. 이렇게 자란 아이가 고위 공직자가 된다면 '국민을 개, 돼지처럼'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블랙독>의 다음 편에서 반전을 상상하게 되었어요. 바로 심화반의 이름이 '이카로스'라는 것이 힌트인데요. 그리스 신화에서 이카로스(Icaros)는 최고의 건축가이자 발명가인 다이달로스(Daedalus)의 아들로, 하늘을 날다 추락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인물입니다.
누가, 왜 이런 이름을 지었는가 나오지 않아 더욱 반전이 의심(?) 됩니다. 고하늘(서현진)샘도 단순히 인정받기 위해 심화반을 맡은 것이 아니라, 다 계획이 있어 보이고요. 교사회의에서 다른 부서의 간섭을 사전에 차단한 것도 어떤 의도 때문이고, 심화반을 반대했던 박성순 부장도 구경만 하고 있을 것 같진 않아요.
그래서 저는 이런 반전을 기대합니다. 태양 가까이에 가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너무 높이 날아올랐다가 날개에 붙인 밀랍이 녹아 바다에 떨어져 죽은 이카로스처럼 되지 말라는 의미로 심화반의 이름을 지은 것이 아닌가 하고요. 그리고 전교 20등 안에 드는 아이들에게 오히려 심화반의 문제점을 느끼게 해주어서 어떤 행동에 나서게 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상상도 해봅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학원에 다니지 못하고 알바를 하며 공부한 여학생도 심화반에 붙었는데, 이 아이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해도 좋겠어요. 교사회의 때 박성순 부장이 한 말처럼, 공부를 잘 하든 못 하든, 다 우리 애들이니까요...
"저는 심화동아리를 만들고 애들한테 혜택을 나눠주기 전에 근본적인 문제부터 같이 보자는 겁니다. 심화반이든 뭐든 활동하고 나면 애들 한 명 한 명 관찰하고 생기부에 그 과정까지 써주는 겁니다. 생기부나 추천서 쓰기 전에 혹시 애들한테 다른 사정이 있는 건 아닐까, 관심 있게 봐주고 물어봐 주는 것, 시험문제 낼 때도 학원 안 다니고 집 어려운 애들도 충분히 풀 수 있을까, 생각하고 내는 것... 다 우리 애들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