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job)스라이팅을 눈치채던 날
잡스라이팅
회사 혹은 상사가 나를 인격적으로, 능력적으로 깎아내릴 때 쓰는 말이다.
(아마도 나와 내 친구들이 만들어 낸 말일 것이다.)
나는 꽤 나이를 먹고 입사한 능구렁이 같은 신입이고, 원래 성격도 가스라이팅이 호락호락하게 먹히는 타입은 아니라서 잡스라이팅을 쉽게 당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새내기 사회인이었다. 지금까지 어린 사원들을 후려치며 길들이던 이들에게 나도 교묘하게 말려들었다. 그 사례들은 차차 쓰기로 하고 오늘은 내가 회사의 잡스라이팅을 눈치챈 계기를 말하고자 한다.
나는 정말 별 거 아닌 계기로 상사가 나를 후려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 사소하고 쪼잔한 일화라 살짝 민망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내게는 꽤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라 기록으로 남긴다.
XX 씨는 뭐 하나 끝까지 하는 게 없어
회사에 어떤 모바일 게임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캐릭터를 수집하고 하루에 주어진 미션을 수행하면서 레벨을 높여가는 게임이었다. 나는 모바일 게임보다는 콘솔 게임을 좋아하고, 특정 장르의 게임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 유행에 탑승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회사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게임 이야기를 했다. 나는 신입으로서 뭔가 그 대화에 참여해야 할 것 같은 부담을 살짝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상사 한 명(A라 칭하겠다)은 정말 하루 종일 이 게임 얘기만 했다.
출근하자마자, 업무시간에, 점심시간 내내 게임을 돌리고, 오늘은 자기가 어떤 캐릭터를 수집했다거나, 자기 가족 구성원 누군가가 뭘 수집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정말 하루 종일 했다.
당시에는 나도 A 상사에 대한 감정이 나쁘지 않았고, 사람들과도 어울리고 싶었기 때문에 그 대화에 끼려고 노력했다. 게임을 깔아서 출퇴근 길 혹은 퇴근 후에 꾸준히 플레이를 했다. 게임은 재밌었지만 굉장히 성가셨다. 원하는 캐릭터를 뽑지 못해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고 하루 미션을 다 하지 못하면 괜히 찝찝한 마음으로 잠들기도 했다.
나는 결국 얼마 못 가 그 게임을 지웠다. 내가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게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시간과 돈을 써가며, 스트레스를 받으며 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사무실에서 모두에게 전했다.
나 : 아 저는 게임 지웠습니다. 뜻대로 안 되니까 별로 재미도 없고 화딱지만 나서요 하하.
A : 지난번에 다른 게임도 하다 그만뒀다고 하지 않았어?
나 : 네. 저는 스토리 있는 콘솔 게임을 좋아해서 모바일 게임은 그렇게 길게 안 해요.
A : XX 씨는 뭐 하나 끝까지 하는게 없어~
나 : ..?
내가 뭐 하나 끝까지 하는 게 없다니.
A는 별생각 없이 말한 걸지도 모르겠다만, 나는 이 말이 굉장히 불쾌했다. 고작 모바일 게임 하나 그만둔 걸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나..? 나를 3개월도 채 보지 않은 상황에서 고작 모바일 게임 두어 개를 그만뒀다고 저런 말을 한다고? 나는 자기 대화 맞춰주려고 관심도 없는 게임을 굳이 플레이하는 성의를 보였는데 말이다!
혹시 그가 별생각 없이 장난으로 저 말을 했을 것 같은가? 아니다.
저 말 뒤에 자신의 아들도 게임을 끝까지 끝내지 않는 끈기 없는 아이라느니, 뭐든 끝까지 해봐야 한다느니 하는 tmi 및 훈수가 줄줄이 딸려 나왔기 때문이다.
XX 씨가 지금 게임할 때야?
나도 참 쪼잔하고 예민하다. '끝까지 하는 게 없다'는 말이 며칠이나 신경이 쓰였다. 중요한 업무 얘기도 아니고 고작 게임 얘긴데도 괜히 내가 뒷심 부족한 사람으로 책 잡힌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A에게 내가 게임을 쉽게 접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어필하려고 했다. 당시 나는 새로 나온 포켓몬 콘솔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A와도 그 게임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기 때문에 스몰 토크 주제로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나 : A님, 저 최근에 포켓몬 신작 시작했어요!
A : 어, 난 그거 별론 거 같더라고.
나 : 아 넵.. 저는 재밌어서 퇴근하고 끝까지 해보려고요!
A : XX 씨가 지금 게임할 땐가?
X발.. 어쩌란말이냐트위스트 추면서..
나는 머쓱함과 무안함 그리고 극대노를 감추기 위해 이를 살짝 악물어야 했다.
분노의 포인트는 여러가지였다. 내 말에 자꾸 부정적인 피드백을 주는 것. 업무 시간을 가리지 않고 모바일 게임을 붙잡고 있는 사람에게서 퇴근 후 콘솔 게임 플레이에 대해 지적받는 것. 내가 지금 게임할 때가 아니라 일 공부나 할 때라는 걸 저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 내 인격이나 능력과 무관한 대화에서도 자꾸 나를 깎아내리는 말을 하는 것..
친구들에게 A 상사 욕을 처음 한 게 이때쯤이지 싶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A가 나를 깎아내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입사 초반부터 자기는 나를 뽑고 싶지 않았다는 둥, 내 지원서와 포트폴리오를 읽어보지도 않았다는 둥, 내가 너무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에게 대놓고 표현하는데 거리낌이 없었기 때문이다. (면접 에피소드에서 내게 '결혼했냐'라고 물었던 것도 이 시람이다.)
'하하 제가 열심히 해야죠'하고 받아쳤지만 늦은 나이에 새로운 진로를 찾고 밥벌이를 시작한 나에게 그 말들은 비수처럼 꽂혔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건가?', '내가 그렇게 부족했나'하고 스스로를 깎아내리느라 잠을 못 자는 날들이 많았다.
이 사소하고 쪼잔한 게임 대화 사건이 아니었다면 나는 상사의 가스 라이팅을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이 사건은 내가 일종의 '각성'을 하는 계기가 됐다. 그때부터 A의 말을 유심히 듣고 분석했다. A는 나를 걱정하거나, 단순히 말을 얄밉게 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를 깎아내리고 길들여서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을 떠넘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이다. 상대의 말을 부정하기 바빠서 가끔 자신이 했던 말까지 부정해버리는 앞뒤 안 맞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A상사에 대해 쓸 말이 많다.
어쩌면 회사가 엿같은 이유도 이 사람 한 명 때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