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예전에 남성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 친구들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남자들은 누구나 한 번쯤 동굴에 들어가는 시기가 있어
동굴에 들어가는 시기란
남자가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하는 시기를 뜻한다. 원인은 우울감일 수도 있고 권태감일 수도 있고 다양하지만 중요한 것은 애인이 그 이유를 억지로 캐려고 하거나 동굴에서 남자를 꺼내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알아서 나오니 서운해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이 표현이 통용되는 것인지 궁금해서 검색을 해보니 꽤나 많은 글이 뜬다. 대부분 남편/남친 동굴에 들어가는 시긴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하는 글이다. 남편/남친이 동굴에 들어갔을 때 어떻게 대처하라는 식의 글들도 많다. 더 찾아보니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에서 유래한 듯하다.
화성인과 금성인의 스트레스 대응법
화성인들은 기분이 언짢을 때 무엇이 자기를 괴롭히고 있는지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는다. 화성인은 조용히 자기만의 동굴에 들어가 해결책이 나올 때까지 그 문제를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해결책을 찾고 나면 기분이 한결 좋아져서 동굴 밖으로 나온다.
금성인들은 낮에 스트레스를 받은 일이 있었다거나 기분이 우울할 때, 자기가 믿는 사람을 찾아가 자기 문제를 속시원히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감정의 공감대가 형성되면 그들은 아까보다 한결 기분이 풀린다.(53)
출처 :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http://www.bhgoo.com/2011/r_review/112445
어렸던 나는 친구의 말을 들을 때나 이런 글들을 볼 때 '오 이렇게 남자의 마음에 대해 한 번 더 알아가는군'했지만 지금의 나는 이걸 듣고 '지랄하네...'라는 생각을 한다. 남자에게 이런 시기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있는 이 시기가 남성의 경우에만 그럴듯하게 포장이 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아서다. 사실 이 시기는 남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유형의 성격을 가진 인간이라면 모두 겪는 시기다. 이 유형의 성격이 어떤 성격인지는 설명이 어렵다. '동굴에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그 성격을 충분히 설명하고 있어서 'a=a'다 라는 동어반복적인 설명밖에 할 수가 없다.
뭐 이 글을 '남자들만 그런 시기가 있는 줄 아냐!'는 비판을 위해 쓰는 것은 아니다. 실은 요즘 내가 동굴에 들어가는 시기다. 모든 것이 권태롭고 성가시다. 그리고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만 널려있다는 기분이 든다. 고민을 얼른 해결하고 싶은데 당장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이다.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 뭔가를 하자니 너무 지긋지긋하다. 주변에 있는 것들이 그렇게 소중하지 않고 새로운 자극을 찾고 싶은데 그걸 적극적으로 하기엔 에너지가 없다. 권태로움이 포화상탠데 귀찮음은 더 포화상태인 상황이라 무언가를 상대하고 싶지 않은 상태다. 이 상태를 설명하는 것조차 성가시고 귀찮다.
내 문제도 성가시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더 성가시다. 가벼운 사회생활도 버겁고 친구나 가족들의 이야기에도 그렇게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혹여 나의 영혼 없는 태도가 누군가를 서운하게 하지 않을지 걱정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은 내가 동굴 밖으로 나올 이유가 되지 못하고 동굴 안에서 며칠 더 생각해 볼 고민거리만 될 뿐이다. 나는 그냥 혼자서 생각하고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가능하면 동굴 안에 원하는 만큼 있고 싶은데 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 그게 쉽지 않다. 잡힌 약속을 소화해내야 하고 다른 사람이 너무 서운하지 않게 적절한 응대를 해야 한다. 내가 동굴 안에 있고 싶어 한다는 걸 이해받고 싶은데 그건 너무 내 욕심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동굴 안에 들어가는 시기>가 남자의 전유물이 됐다는 것에 살짝 짜증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시기는 누구에게나 있고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