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꽤나 허영이 많은 사람이다.
내 수많은 허영 중 하나는 궁핍한 지갑 사정을 밝히지 않고 최대한 지갑이 넉넉한 척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전엔 과소비가 정말 잦았다. 사람들과의 모임에서 누군가 비싼 식당을 가자고 얘기해도 결코 난처한 티를 내지 않고 '좋다'라며 호응했다. 술값을 생각하지 않고 술을 진탕 마신 적도 많고, 감사한 일이 생기면 내 분수에 맞지 않게 그걸 되갚을 때도 많았다.
내가 경험하기로 "나 돈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에는 세 부류가 있다. 첫 번째는 정말 돈이 없고, 급박하게 아껴야 해서 지갑 사정을 말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다. 두 번째는, 사실 매우 넉넉하나 쓸데없는 지출을 줄이기 위해 지갑 사정을 말하는 것을 개의치 않는 사람이다. 이들은 불필요한 지출을 줄여서 넉넉한 지갑에 한 푼을 더 모은다. 절제를 통해 부의 선순환을 만들 줄 아는, 경제관념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자린고비인 것은 아니고, 정말 필요하다 싶은 순간에는 화끈하게 쓸 줄도 아는 사람들이다. 내가 되고자 하는 쪽이 이렇다. 마지막 세 번째는, 지갑 사정은 넉넉하지만 일단은 '없다'며 앓는 소리를 내는 이들이다. 이들은 남에게 베푸는 것도 인색하지만 남에게 마땅히 써야 할 돈에도 인색하다. 직원들을 어떻게든 박봉으로 굴리려는 고용주가 대표적인 사례겠다.
원래 나는 '돈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저 셋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나는 뭐랄까.. 굶어 죽을 정도로 돈이 없진 않아서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급급했던 사람이다. 사실 그 돈은 경제적 독립을 하기 전, 부모님의 지갑에서 다 나온 것들이었다. 경제적 독립을 차츰 준비하기 시작하면서, 요즘의 나는 첫 번째 유형의 사람이 되고 있다.
나 돈 없다.
돈이 없어서 당분간 약속을 잡을 수 없다.
종종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다 이 얘길 했다. 하나도 부끄럽지 않고 속이 후련했다. 왜 진작 이런 식으로 내 지갑 사정을 밝히지 않았을까? 내 주변 누구도 내가 궁핍하다고 손가락질할 사람들이 아닌데 왜 나 혼자 괜히 허영을 부렸을까. 지갑 사정은 비슷한데, 지갑 사정을 밝히기 전보다 후가 훨씬 더 기분이 좋다. 이제 정말 어떤 것에도 부담을 느끼지 않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나만의 경제생활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지갑 사정을 밝히면서, 내 사정을 이해 못 해주거나 '유난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걱정하긴 했다. 다행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내 경제적 고민에 공감해주거나 나의 절약에 함께 동참해주었다.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눈치 없게 굴었지 말이다. 솔직히 그런 사람들이 나를 궁상 맞다고 뭐라하는 것에는 타격을 하나도 받지 않는다. 그 사람들한테 맞춰 준다고 나한테 한 푼 더 떨어지는 건 아니니까.
아무튼 너무 후련하다. 열심히 모아서 내 인생의 소중한 부분들에 아낌 없이 쓰고 싶다.
행복은 절제에서 온다는 말을 요즘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