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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괴왕 Aug 20. 2024

14. 멀쩡한 상사와 썩은 상사

팀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내가 잘 따르던 부서장(B), 나보다 1년 먼저 들어왔던 사원이 줄줄이 퇴사를 했고 나는 퇴사를 통보하고 퇴사일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상태다. 세 사람이 같이 퇴사하자고 입을 맞춘 것도 아닌데 타이밍이 그렇게 됐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에 쓸 일이 있을 것이다.


내가 퇴사를 통보한 뒤 며칠 뒤에 새로 부서장이 부임했다. 새로 온 부서장(A)은 전임 부서장 오기 전까지 우리 부서장으로 계셨던 분이다. 회사에 오래 몸 담고 있다가 잠깐 트러블이 있었는지 1년 정도 다른 회사에서 일을 하더니 올해 다시 우리 회사로 돌아왔다. 돌아오면서 마찬가지로 우리 회사와 오래 함께 일했던 협력사 사람(C)을 우리 팀 팀장 자리에 앉혔다. 새로웠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우리 회사를 잘 알고 업무 프로세스를 잘 꿰고 있는 사람들이다.


한 달 정도만 참으면 이곳을 떠나는데도 이 변화가 너무 견디기 힘들다. A는 꼰대다. 전에 같이 일했던 동료와 상사들도 A를 힘들어했다. A는 우리 업무의 실무를 해본 경험이 젊을 때 잠깐이고, 이후는 영업 경력이 대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관리자가 됐다. 우리 회사가 원하는 건 질 좋은 업무가 아니라 많이 팔 수 있는 업무기 때문이다. 그러나 A는 자신이 누구보다 우리 실무를 잘 안다고 생각한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본인이 무책임하게 아이디어를 내놓으면 실무진들은 그걸 어떻게든 실현해 냈으니까 본인 입장에선 그것이 본인의 실력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우리 입장에선 터무니없는 아이디어를 자꾸 뭐라도 되는 양 얘기하니 그게 너무 피곤하고 질린다.


게다가 그는 실무진들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는다. 뭔가 의견을 얘기하면 "너네가 노력하지 않아서"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반박이라도 하면 기분 나쁜 티를 낸다. 그의 발언은 너무나도 전형적인 꼰대의 그것이라서 여기에 일일이 나열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다. 칼퇴는 욕심이다. 야근을 하면서 노력해야 한다. 팀끼리 술 한잔 마시면서 똘똘 뭉쳐야 한다. 어딜 가나 다 똑같다. 다른데 가도 다 이렇게 한다. 개발을 하나 했으면 더 들여다보지 말고 바로 새로운 걸 개발해야 한다. 회사는 배우는 곳이 아니라서 알아서 잘해야 한다. 이것도 할 줄 알고 저것도 할 줄 알아야 한다. 결혼하지 않고 애를 낳지 않는 건 이기적인 것이다. 부동산을 사서 시세차익 보는 건 당연한 거다.


떠난 부서장 B를 내가 잘 따랐던 이유는, B는 팀의 고질적인 문제를 잘 알고 있고 잘못된 시스템과 프로세스를 개선하려 애썼기 때문이다. 영업 부서가 상품 개발을 담당하는 우리 팀과의 논의 없이 고객에게 상품 개발이 가능하다고 호언장담 하는 것에 화를 냈다. 팀원들의 업무 역량과 무관하고 커리어에 아무 도움 되지 않는 일은 최대한 밀어내려고 했다. 지금까지 관리가 되지 않던 상품의 개발 이력 관리를 하려고 했다. 업무에서 잘못 사용되고 있는 전문 용어들을 바르게 사용하고자 먼저 공부하고 그 지식을 우리에게 나눠줬다.


B의 혹독한 원칙주의와 완벽주의가 너무 성가셔서 많이 대들기도 했다. 그도 결코 완벽한 상사는 아니었다. 늘 내가 부족하다며 사람을 들들 볶아대고 비겁한 꼰대의 모습을 보인 적도 많다. 하지만 그의 원칙과 논리가 회사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회사의 어르신들은 B를 싫어했다. B는 임원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임원들은 술자리에서 업무 얘기를 하고 자기네들끼리의 합의점을 찾는다. B는 그걸 극도로 싫어해서 회의실 밖에서 무언가를 합의 보려고 하지 않았다.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웬만하면 사적으로 식사 자리를 마련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어르신들 입장에서 B는 굉장히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이다. 가끔 내가 보기에도 그렇다. 구시대 사람인 그가 한국 마초 사회에서 저런 식으로 몇십 년 간 직장 생활을 해왔다면 외롭고 속 터지는 일이 꽤 많았을 거다. 그런 그는 지금까지 다녔던 회사 중 이곳이 최악이라고 했다. B는 내게 '어떻게 기본 개념도 모르는 사람들이 이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자주 한탄했다.



"회사에 돈이 되는 일을 하세요."

한 번은 회의에서 한 임원이 B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나는 우리의 부서장이 그런 말을 듣는 것에 매우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고, 이미 실망한 회사에 더 큰 실망을 느끼기도 했다. 우리 회사는 정말 한 치 앞만 보는 거였다. B는 자기 좋자고 원칙을 고집하는 게 아니었다.(물론 병적인 면이 있어서 자기만족이 아주 없진 않았을 것이다.) 실무를 하지 않는 입장에서 원칙을 무시하고 마구잡이로 일을 진행하면 B로서는 손해 볼 게 없다. 회사와 대치하지 않아도 되고 일을 던져 놓고 본인은 적당히 쉬면 된다. 그럼에도 원칙을 고집한 이유는 조금 시간이 걸려도 잘 만든 상품이 하나라도 있어야 안정적인 수익 창구가 생긴다는 아주 기본적인 이유에서였다. 우리 팀 업무 문화를 잘 정립해 놓으면 그다음부터는 효율적으로 더 많은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회사는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 업계에서 우리 회사와 일하기 싫어하는지, 왜 점점 더 영업 실적이 떨어지는지, 우리 팀 팀원들의 평균 근속 년수가 3년이 채 되지 않는 지를..!


결국 B는 해고 처리가 됐다. 부서장 자리를 내려놓고 현장에서 실무를 하라는 회사의 제안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의 직급은 이사였다.


돌아온 A는 B가 팀을 망쳤다는 식으로 이야길 한다. 자꾸 팀원들에게 '뭘 잘 모르는 상사 밑에서 고생했다'는 식의 말을 한다. 나는 퇴사를 통보한 뒤 진행된 면담에서 B에 대한 내 생각을 밝혔다.


"B님이 뭘 잘 몰라서 네가 많이 힘들었을 거야. 그렇지만 앞으로 나와 함께 하면 네가 많이 클 수 있을 거야."


"아니요. 저는 B님이 계셔서 지금까지 업무 처리를 수월하게 해냈고요. 업무적으로도 배운 게 정말 많습니다. 회사의 어떤 분들보다 B님이 업무를 잘 아시는 것 같았어요. B님이 안 계신 것도 퇴사 사유 중 하납니다."


그동안 B에 대해 좋지 않은 이야길 하려고 나를 떠보던 모든 사람들에게 나는 저런 식의 대답을 했다. 내가 정말로 B를 엄청 존경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가 생각했던 팀의 방향성에 대해 나도 동의한다는 걸 돌려서 말하고 싶어서였다. 내 충성심(?)을 비웃고 싶은 건지 그 이후에도 A는 지속적으로 B에 대해 부정적인 뉘앙스로 이야기한다.


B가 우릴 위해, 회사를 위해 거절해 뒀던 업무들이 다시 하나둘씩 들어온다. 팀원들이 사비를 들여서 쓰던 업무용 도구를 사달라고 회사에 요청해 뒀는데 그것도 지원 비용이 축소됐다. A는 싸구려 뷔페 음식처럼 가짓수만 많은 업무들을 가지고 와서는 실실 웃으며 말한다.

"능력 있는 팀장이 왔으니 너네 이제 맨날 야근해야 한다. 하지만 많이 배울 수 있을 거야. 김(나)은 이런 좋은 걸 못 배워서 어떡해~."


남은 한 달간 매일 저런 소리를 듣고 있자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 거린다. 하지만 A가 오고부터 퇴사 이후에 대한 불안감은 사라졌다. 일단 퇴사 자체가 너무나도 현명한 판단임이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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