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이 있는데 비를 맞는 사람이 어디 저 하나뿐인가요?
올드하고 클래식한 2000년대 멜로 영화의 정석
영화가 개봉했던 2003년, 나는 겨우 여덟 살이었다. 물론 영화를 보지 못했고 스물둘이 다 되어서야 이 영화를 처음으로 접했다. 예전에 언뜻 봤었던 기억이 있는데 영화 내용 전체가 기억나지 않아서 다시 보는 동안 꽤나 집중했었다.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이라는 OST 때문에 더욱 유명한 이 영화가 왜 네이버 영화 평점 2위인지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 보지 않고 스물넷에 이 영화를 볼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생각도 든다.
올드한 느낌의 필름, 진부한 전개의 스토리지만 정석에는 정석의 이유가 있는 법이다. 영화는 전형적인 2000년대의 멜로 영화이다. 현세대의 로맨스와는 다른 어감의 멜로 영화. 나는 2000년대의 영화의 그런 전형 적임을 제일 좋아한다. 생각하면서 깨달으면서 보아야 하는 마음이 아닌 그 시절만이 가지고 있는 침범할 수 없는 순수함으로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 시대가 지나도 정석이나 명작이 되는 영화는 흔치 않다. 구닥다리 취급을 받고 그때와는 다르다는 이유로 촌스럽다는 이유로 힘을 잃기도 한다. 하나, 이 영화는 아마 제목 그대로 10년 뒤에도 20년 뒤에도 가장 클래식한 영화로 기억되지 않을까.
영화를 보다 보면 알겠지만 내용 초반부에 '어, 소나기인가?' 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는 곽재용이 직접적으로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의 리메이크를 시도한 작품이다. 인물 설정 자체가 부유한 서울 소녀와 시골 소년이 만난다는 설정일뿐더러, 또 비를 피해 오두막으로 도망친다는 전개 자체가 완전히 닮아있다. 그래서 영화를 시작하게 되면서 알게 모를 묘한 기분이 온 전신에 느껴진다. 우리가 성장하던 어린 시절에 가장 처음으로 접했던 짧은 사랑의 단편소설을 영상으로 먼저 만나본다니 시작부터 꽤나 두근거렸었다.
본래 배우 조승우를 좋아하는 편이라 영화에 깊게 몰입했던 점도 있겠지만 배우들의 연기가 이렇게 잘 떨어지는 멜로 영화는 드물다. 손예진은 1인 2역을 맡음에도 불구하고 극에 완벽하게 녹아내려 관객으로 하여금 애절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22살의 손예진의 청순미가 정말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조승우 특유의 감정선은 사람을 설레게 하고 함께 마음 아프게 만드는 마법 같은 힘을 가졌다. 조연급으로 등장한 이기우도 어마어마한 연기력을 뽐냈으니 말을 잃을 수준이었다. 영화가 이렇게 물 흐르듯이 흐르면 좋겠지만 조인성의 연기가 압도적으로 보기 힘들다. 조인성이 쓰리톱 주연임에도 불구하고 분량이 정말 적다. 이 때문인지 촬영 이후에 이런저런 루머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도 다른 배우분들의 놀라운 연기력으로 커버가 되었으니 영화가 잘 흘러갔다고 느껴진다.
이 장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알 것 같은 이 장면. 이 장면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시간이 지나도 손가락에 오르내리는 명장면이기에 시대가 흘러 많이 지난 후에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게 아닐까. 이런 걸 보면 사람들의 감성은 어느 정도의 공감대가 잘 형성되어 있는 게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우스운 이유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는 이유 중 하나가 수능특강이라는 문제집에 시나리오가 몇 번 문제로 출제된 적 있다. 실제로 본 사람들 중에 몇은 문제집을 풀다가 도저히 궁금해져서 봤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만큼 시대를 내려오면서도 사람들 마음속에 잘 간직되어있는 장면이 많이 있는 것 같다.
좋은 대사들이 많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시대를 관통하면서까지 사람을 두근거리게 하는 대사가 한둘이 아니다. 손예진의 "우산이 있는데 비를 맞는 사람이 어디 저 하나뿐인가요?"부터 시작해서 장면마다 아름다운 대사들이 쏟아져내린다. 무엇보다 영화 내에서 편지라는 소재 안에서 아름다운 대사가 굉장히 많은데 그중에서도 단연 "가만히 눈을 감으면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람이 부는 날 창밖으로 보이는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 제일 좋은 구절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낯간지럽고 듣는 이로 하여금 부끄럽게 만들 수도 있지만 영화 내용 자체에 꾹 몰입해있다면 그런 것쯤은 낭만으로 느껴지기 마련이다.
영화 OST 라인이 이렇게 환상적인 국내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앞서 말했듯 자전거 탄 풍경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도 장면과 잘 맞아떨어지고 델리 스파이스의 '고백' 또한 장면과 정말 잘 어울렸다. 하나, 그중에서도 제일 마음에 들었던 건 故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다. 음악 자체도 굉장히 좋지만 이 장면에서 수많은 남자들이 질질 짰음을 확신한다. 아직 본 사람이 없다면 이 장면을 위해서라도 영화를 다 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영화를 볼 때에는 잘 몰랐는데 사실 영화를 보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특유의 암울한 분위기가 이어져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영화 중간중간에 복선이 많이 깔려있다는 것도 영화를 본 이후에 알 수 있다.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이 암울한 분위기도 잊게 되는데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제발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몸부림이 있어서였던 것 같다. 영화를 다시 보면 그 숨겨진 복선을 찾는 맛도 있는 것 같다. 물론 영화는 좋은 쪽으로 흘러가려고 하지만 억지스러운 느낌이 적잖아 있다. 오히려 그런 부분이 있었기에 클래식한 느낌이 돋보인 게 아닐까.
2000년대 특유의 영화들은 서로 닮아있다. 그 시절 당시의 시대상을 대표하는 것 중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던 게 영화이지 않았을까. 대부분의 전개와 스토리 방식 소재가 비슷하지만 모든 영화가 하나하나 색깔이 모두 살아있다. 베이스는 비슷해 보이나 열어보고 나면 하나하나 다 소중하게 느껴지는 자식 같다고 해야 할까. <클래식> 한 편을 보았을 뿐인데 며칠 동안 그 시대의 영화를 하루에 한 편씩 몰아봤던 기억이 난다. 같은 감독이 만든 전지현과 차태현의 <엽기적인 그녀>부터 한석규와 심은하가 주연한 <8월의 크리스마스>, 이병헌과 수애가 주연한 <그 해 여름>까지 쭉 이어봤었다. 역시 2000년대 멜로 영화가 최고다.
이전에 아는 친구가 '이 영화가 왜 명작인지 잘 모르겠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2000년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충분히 발끈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어쩌면 영화가 너무 올드하게 느껴지고 시시콜콜한 멜로 덩어리라 별로라고 느껴질 수도 있겠다. 감동을 느끼고 사랑을 느끼는 감성은 사람마다 제각기 다르기에 함부로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나, 그럼에도 후세의 명작으로 남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세대에 잘 보존되지 않은 낭만이 잘 젖어있어서가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앞서 말했지만 현시대에 완성된 멜로 영화와는 느낌이 다르다. 그 시절에 가공되지 않은 날 것의 순수한 투박함이 많은 사람들에게 명작처럼 느끼게 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를 정말 잘 보고 싶다면 그때 당시의 시대상과 각 소재의 의미들을 되새기며 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꾸며진 것 없이 너무 솔직했던 영화, 그러기에 마음껏 슬픔에 잠길 수 있었던 영화 <클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