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솔 Dec 21. 2020

<청설>

들리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도.


  로맨스 장르 속에 숨겨진 달달한 주제의식


영화를 보고 싶다고 생각하면 가장 먼저 로맨스 장르가 떠오른다. 혼자 사는 게 익숙해지면서 죽은 감성 되살리는데 로맨스만 한 장르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로맨스 영화를 찾아볼 때 나는 몇몇 필터를 끼워두고 영화를 찾아보는 편인데,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작품이 어디서 탄생했는지를 보는 것이다. 배경만으로 영화를 판단해서 본다는 것이 우습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생각보다 효과가 있는 편이다. 팬심으로 가득 채워서 보는 나라가 바로 대만영화인데 대부분의 작품들이 내게 실망 없이 비교적 좋은 인상을 남겨주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부러 재미있을 것 같은 영화는 몇 편씩 뒤로 미뤄놓고 나중에 봐야지 하고 아껴두는 편인데 그중 하나가 바로 <청설>이다. 영화를 습관적으로 보던 때부터 눈에 띄어서 '봐야지' 하고 다짐했지만 아까운 마음에, 마치 맛있는 음식을 제일 뒤에 먹어야 할 것처럼 미루어두다가 마침내 보게 되었다. 




 <청설>을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대충 '내가 듣기로는' 정도가 되겠다. '내 말을 들어주세요'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생각하기엔 전자가 오히려 영화의 주제나 분위기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청설>의 시놉시스는 비교적 간단하다. 손으로 말하는 양양(진의함 분)과 그녀에게 반하게 된 티엔커(펑위엔 분)의 연애 스토리다. 양양은 청각장애인 언니 샤오펑(천옌시 분)과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손으로 말한다 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화를 보기 전에 시놉시스를 보는 편일 텐데, 개인적으로 시놉시스가 영화에 비해서 조금 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로맨스라고만 정의하기엔 가족애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고, 사랑이라는 주제를 넘어서 이해에 관한 직관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화였다. 영화의 비중만 따져보았을 때에도 남녀의 로맨스보다 이해에 관한 메시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분위기, 그 특유의 무드를 유심히 관찰하는 편인데. 영화 초반부 10분 내에 탐색전을 끝마치는 편이다. 전개 속도는 어떤지, 영화의 전체적인 색감은 어떤지, 영화 배경의 비주얼은 어떤지 등등 보다 보면 10분 안으로 마음에 드는 영화인지 아닌지가 금방 판명나버린다. 때문에 아깝게 놓친 몇몇 작품들도 있겠지만, 첫인상에 마음이 가지 않는 것만큼은 돌릴 방도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청설>은 마음에 꼭 들어맞는 영화는 아니었다. 색감이나 비주얼은 마음에 들었지만, 배경 설명조차 없이 전개되는 10분의 시간 동안 영화를 단번에 파악하기가 조금 어려웠기 때문이다. 심지어 초반 10분에는 주인공들의 목소리도 들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대사가 말이 아닌 수화로 진행되기 때문에 자막을 놓치면 인물들의 감정조차 읽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설>이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개인적인 취향의 무드를 잘 지켰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만영화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부모님의 오래된 필름 카메라를 인화해 보는 그런 기분이 든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유난히 짙은 따뜻한 색의 톤과, 그런 톤에서 오는 청량함, 고전적인 배경음악, 오래된 것 같은 장비와 순진한 인물들의 성격까지. 영화 자체가 2009년 개봉작이다 보니 오래전처럼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지만, 최근에 개봉하는 영화들을 보더라도 그 감성을 자극할 줄 아는 것이 분명하다. 이런 무드들에 어울려 떨어지는 스토리가 후반부까지 잔잔하게 이어진다. 뚜렷이 매력적으로 끌어당기는 것과는 다른 삼삼한 맛이 있는 영화임은 분명하다. 영화 중반 중반마다 의도적으로 연출한듯한 여백 또한 마찬가지로 그런 맛을 위한 첨가물 정도가 되어주었던 것 같다.




하나, 대놓고 말하자면 스토리 전개 방식은 진부한 편이다. 로맨스 영화의 뻔한 답습을 그대로 이어서 가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녀가 우연하게 만나고, 반하고, 오해하고, 화해하고 ... 내용만 꺼내놓고 보자면 심심하기 짝이 없지만 영화의 부소재들을 잘 활용했기 때문에 높은 평점을 주고 싶다. 영화는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인물 한 명의 감정에만 초점을 맞춰 서사를 진행하지 않는다. 꽤나 급작스러운 전개에서도 자연스러운 흐름을 지킬 수 있었던 방법이었다. 인물들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도 스토리의 본질을 잊지 않는다. 청각장애인이라는 소재를 덧대어 대사 몇 마디 없는 이 영화가 주는 감정과 메시지는 무엇일까.ㅍ영화가 조용했던 탓에, 영화를 보며 이런저런 사색에 빠지는 걸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도리어 좋은 기회를 주었던 셈이다.




영화 정보를 보면서 단순한 로맨스물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영화 소개를 잘 못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맨스 장르로만 판별하기엔 가족애를 이야기하고픈 장면들이 많이 보였다. 언니의 꿈을 응원하기 위해 희생하는 동생이 결코 아름답게만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도 일차원적인 인물의 서사로 잘 보인다. 남녀의 감정 변화보다 자매의 감정 변화가 더욱 초점이 맞춰진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동시에, 남자 주인공 티엔커의 가족 또한 이러한 모습을 더욱 부각한다. 청각장애를 가진 여자 친구를 들이는 일은 분명 큰 고민이었을 것이다. 아들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믿어주는 것에 대해 주저했을지도 모른다.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가는 길을 보는 과정은 즐겁지만, 현실에 맞대어 비추어 보았을 때 괜히 씁쓸한 감정이 들었던 것만큼은 부정하고 싶지 않다. 




청각장애인도 똑같은 일상이 있다는 누군가의 리뷰가 흥미로웠다. 그토록 영화를 많이 봤던 내게도 일종의 프레임이 있었다는 게 동시에 부끄러웠다. 맞는 말이다. 그들과 우리의 차이는 손과 입이었을 뿐이었다. 밥을 먹고, 꿈을 꾸고, 잠을 자고 이런 모든 행동들이 매번 희생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내 꿈을 빼앗지 말라는 강한 어투에서 마침내 양양은 착각에서 벗어나 샤오펑과 진심을 공유한다. 언니의 응원이 되어주고 싶었던 삶이 의무로 바뀌는 순간이 얼마나 큰 부담이었을지, 깨닫은 순간에서야 서로에게 진심이 되어준다. 그리고 양양은 그 순간에 성장의 길로 걸어간다.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깨닫고, 자신의 사람에게로 돌아가도 괜찮다는 각오를 한다. 이 과정을 관객은 같이 걸어간다. '수화를 하는 사람이니까 말도 못 하겠지'라는 프레임을 벗어나 결말에 당도하는 순간 알게 모를 희열을 느끼게 된다. 결국, 오해는 주인공과 마찬가지인 우리도 함께 했었던 셈이다.




'말 안 했어, 수화로 얘기했어요.' 이 대사 한 줄이 영화의 주제를 관통한다. 들을 수 없어도,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마음은 통한다는 것. '사람과 꿈은 기적 같은 일이다 들리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도 통역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 영화는 직접적으로 주제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야기하지 않는데 내 모든 진심이 통하길 바라는 것은 이기적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때문에 소통은 가끔 불통이 되고, 어긋나고 오류를 범한다. 주인공은 그래서 고민하고 생각한다. 상대방을 탓하기보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다시 노력한다. 마침내, 이뤄낸 사랑 앞에서 두 주인공 모두 깨닫는다. 사랑이나 꿈 모두 굳이 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고 말이다. 가족이라면 희생이 아닌 믿음으로 응원할 수 있고, 사랑이라면 노력하려 애쓰지 않아도 마음은 통한다는 것까지 영화 전반적으로 거듭 강조해서 이야기한다. 특히, 결말 부분에서 이 메시지는 역으로 더 강하게 드러난다. 눈치챌 것만 같은 반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말까지 다다르게 하는 힘은 바로 메시지에 있었던 셈이다.




<청설>은 맘 놓고 쉽게 보기에 편한 영화다. 극적인 영화 장치나, 판을 뒤집을만한 갈등이나, 무지막지한 반전이 있는 그런 영화가 아니다. 20대로 보이는 젊은 두 남녀가 조금 특수한 상황에서 사랑을 이루어가는 뻔한 영화일지도 모른다. 이런 로맨스 영화를 두고 나는 '순수하다'라고 표현하는 걸 좋아한다. 유치하다는 표현보다는 조금 더 괜찮은 표현을 하고 싶은 일종의 팬심일지도 모른다. 기대를 하고 보면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밤에 맥주 한 캔 꺼내놓고 가벼운 안주랑 보기에는 딱 적절한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덧붙여, 코로나 때문에 2020년 영화 시장이 완전히 기울고 말았다. 영화관이 문을 닫으며 제작사들은 제작을 멈추고, 큰 규모의 영화들의 대부분이 개봉을 연기하거나 심지어는 취소하기도 했을 정도니까 영화계 여파가 얼마나 큰 지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보는 것만으로도 큰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영화라는 하나의 장치를 통해 로맨스를 보며 죽어있던 감정을 깨우고, 액션을 보면서 꿈을 키우며, 다큐멘터리를 보며 사실을 깨닫는 과정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았으면 한다.




사진 출처 : <聽說> In Moive.


매거진의 이전글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