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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솔 Apr 20. 2021

죽음을 관망하는일.

9

경험해보지 못한 선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는 일.


나이를 꽤 먹은, 오래 산 노묘 한 마리가 숨을 헐떡인다. 붉은 조명 아래에서 온갖 줄에 감긴 채로 호흡을 내뱉는다. 병원장에서 선명하게 적힌 DNR 표시로 보아 아마 오늘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조금 있으면, 보호자의 울음소리가 병원을 가득 메울 것이고, 긴 침묵이 이어질 것이다. 이런 생각도 잠시라는 걸 알지만, 생각을 하는 동안에 무거운 마음은 가라앉지 않는다.


운명의 선 앞에 선 노묘가 죽음을 견디는 동안, 숨소리보다 규칙적인 기계 속의 심박동 소리가 병원 곳곳을 찌르듯이 울린다. 보호자는 먼 길을 돌아오고 있을 터이다.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가느다란 생명선이 얼마나 버텨줄지는 모른다. 호흡을 위해 삽관을 시도하지만 그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는다. 어쩌면, 노묘 코 앞에 죽음이 닿은 것일지도 모른다. 시간만이 적막하게 흐르는 공간, 그곳에 서있으면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이 한 끗 차이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4월 19일 오후 4시 38분, 치즈색을 가진 노묘는 죽었다. 병원 처치대 위에서, 온갖 줄을 몸에 달고서 식은 몸과 달리 따듯한 담요를 덮고 그렇게 떠났다.




아이들의 죽기 전 순간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정말 죽는다는 운명 앞에 선 아이가 맞는지 의문일 때가 많다. 아까까지만 해도 쥐 죽은 듯이 누워있던 아이가 몸을 들어 여기저길 돌아다니기도 하고, 병원장 창문 너머로 이런저런 울음소리를 내기도 한다. 아이와 눈을 맞추고 있다 보면, 눈동자 속에 죽음이라곤 감히 느껴지지 않는다. 하나, 선생님들의 생각은 다르다. 갑자기 일어나 몸을 비트는 순간, 죽음의 신호를 의미한다.


거짓말처럼, 몇몇 아이들이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순간이 지나면 위급상황에 들어간다. 급히 처치대 위로 올라오게 되지만 선명히 찍힌 DNR 표시 때문에 죽음을 기다리는 것 외에 고통을 조금 덜어주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다. 정확히 무엇을 하고, 어떤 처치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선생님들의 덤덤한 표정과 반대로 소란스러운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생명이란 게 그리 쉬운 단어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병원에 찾는 모든 미물들의 태어난 순간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얼마나 사랑받았는지, 또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가늠조차 하지 못한다. 다만, 생김새나 마지막으로 병원에 있는 동안의 순간만으로 아이가 어떤지 어림잡아 짐작할 뿐이다. 죽는 순간의 직감은 불현듯 찾아오면서, 살아있는 순간의 일부만을 볼 수 있다니 아이러니하고도 불행한 공간이다.


지금껏 많은 죽음 앞에 있어보았지만, 오늘만큼 선명한 죽음은 또 처음이었다. 멀리서나마 얼핏 아이들의 죽음을 보던 것과는 다르게, 오늘은 내 눈앞에서 아이가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입원장 밖을 보고 있지만 눈에 초점이 없잖아요,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테크니션 선생님의 말이 퇴근 후에도 맴돈다.




죽음을 관망하는 일. 이걸 어떻다고 설명해야 할까.


고통스러움, 잔인함, 괴로움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은연중에 마음을 잠식해가는 깊은 우울감에 가깝다. 영문은 알 수 없다. 내가 키운 아이도 아니었고, 내가 특별히 아껴보던 환자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냥 오늘 지나치다가 본 상태가 좋지 않은 환자 중 한 명이었다.


담요에 쌓여있던 아이는 보호자와 함께 길을 떠났다. 보호자의 품에 안겨 병원에 들어올 때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을까. 보호자는 그 순간이 마지막이라는 걸 알 수 있었을까. 모든 게 예측대로 되지 않는다지만, 이런 상황의 시간은 누가 정하는 걸까. 생의 타이밍은 어디에서 시작되어 순간을 맞는 걸까.




카메라 너머에서 혹은, 병원 복도 너머에서 한 미물의 죽음을 관망한다. 모두가 그렇겠지만,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나와 달리 선생님들은 죽음에 태연한 듯해 보이지만, 사실 그 속을 나는 알 수 없다. 한 아이의 죽음조차 관망하는 처지일 뿐인데, 내가 어찌 사람들의 마음까지 알 수 있을까.


나는 한참 동안이나 죽은 노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을 흘린 것은 아니다. 애도한 것도 아니고, 기도를 한 것도 아니다. 그냥 멍하니 한참 동안이나 그 감기지 않은 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언젠가 때가 되어 떠난 것뿐이지만, 그 눈망울 안에 담은 세상이 얼마나 컸던가 싶었다. 세상의 일부가 아이에겐 전부였겠지만, 마지막 길은 어디로 떠나게 될까. 


7시가 다 되어 퇴근을 하면, 저녁노을이 붉은색으로 물든다. 오후도 저녁도 아닌 어중간한 경계선의 세상은 때론 아름답고, 때론 비참하다. 저녁 노을 지는 보랏빛 풍경이 내 마음속에서 어둡게 번지다가 조용하게 피어올랐던 것처럼, 오늘 떠난 아이가 저 아름다운 풍경을 타고 떠났길 조용히 바란다.


※ 원문에 게시되는 글은 모두 의학적 소견이 아닌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자세한 증상이나 문의는 가까운 동물병원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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