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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솔 May 18. 2020

<윤희에게>

뭐든 더 이상 참을수 없어질 때가 있잖아.

'윤희'로 남아있는 모든 사랑들에게


퀴어 소재를 다룬 영화라고 알려진 영화 <윤희에게>. 더군다나 김희애 배우가 주연으로 출연한다는 소식에 이렇다 할 내용을 상상하기 어려운 영화였다. 소재가 신선하긴 하나 어떻게 표현할지, 감독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이해할 수 없으면 어떡하나 싶어 선뜻 꺼내보기가 어려운 그런 영화였다. 기획이나 연출이 아무리 좋다 한들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거나 소재 자체가 민감하다면 본능적인 불편함이 있다보니 걱정부터 앞서는 것이 사실이였으니 말이다. 19년 11월 가을 끝자락에 개봉한 작품이지만 한낮 더위가 짱짱한 이제서야 이 영화를 꺼내보게 되었다. 한참을 아껴뒀다 꺼내보는 만큼 설렘 반, 걱정 반으로 영화 틀었는데 걱정도 잠시, '참 마음에 드는 영화다'라고 생각했다. 덧붙혀 눈 내리는 겨울에 다시 한 번 보고싶다고 생각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주부의 삶 '윤희(김희애 분)' 앞으로 우연하게 도착한 편지 한 통, 그 편지를 읽게 되는 그녀의 딸 '새봄(김소혜 분)'. 첫사랑을 떠올리게 만드는 구절에 새봄은 비밀 여행을 계획하게 되고 윤희와 함께 일본으로 떠나게 된다. 첫사랑인 '쥰(나카무라 유코 분)'이 있는 곳으로 말이다. 소재만 놓고 보았을 때 여느 평범한 멜로와 다를 거 없어 보인다. 첫사랑의 기억을 가진 은밀한 만남 그리고 우연한 재회까지, 전통적인 클리셰를 따르는 듯 하지만 '동성애'라는 꽤나 중후한 주제를 함께 던짐으로서 소재 자체의 신선함을 더해주지 않았나 싶다. 더군다나 '모녀의 여행기'라는 다소 가벼운 전개로 부담없이 볼 수 있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그런 영화였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주인공들이 주고 받는 편지와 눈이 내리는 겨울, 일본 배경의 오타루까지 ... 어쩐지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가 떠오르는 영화였다.




가장 중요한 쟁점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퀴어 소재를 다뤘기 때문에 불편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묻고싶은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대답부터 하자면 '아니'라고 하고싶다. 김희애 배우가 '소재 자체는 다소 파격적일지 모르지만 일상적인 스토리, 따뜻한 메시지가 녹아 있어 좋았다.'라고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듯 그녀의 평범하고도 정성스러운 연기가 관객에게도 그 마음 그대로 전달되게 만든 듯 하다. 영화 자체가 사랑을 다루고 있지만 이것이 '동성애'에 국한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고 싶다. 영화의 설정을 배제하고 본다면 그냥 따듯한 한 편의 멜로를 보는 듯 하고, 무엇보다 영화 내내 사랑에 대해 주저리 떠들기보다 일상에서의 평범한 모습과 동시에 모녀의 훈훈한 여행의 일정을 함께 담아냈기 때문에 편하게 접근할 수 있었다. 시점의 변화가 크지도 않고, 스토리의 전개가 너무 빠르지도 자극적이지도 않기 덕문에 부담스럽지 않게 관객에게 친절히 다가오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만약 이런 걱정 때문에 영화를 미루거나 걱정하고 있다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 하고 싶다.




겨울을 필름으로 만든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윤희에게>는 배경을 참 잘 담아놓은, 정성껏 찍은 티가 나서 좋은 영화였다. 각종 미장센들이 마치 '그리움'을 연상시키는 듯한 영상미가 가득 담긴 그런 영화였다. 눈쌓이 오타루가 주는 특유의 따듯한 눈의 분위기가 관객을 포근하게 끌어당기는 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스토리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런 영상미다. 영화는 시청각적인 감각을 사용하는 매체이기 때문에 이야기가 아무리 좋다 한들 감각적으로 소구시키지 못한다면 실패한 영화나 다름없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감각적으로 잘 다듬어진 <윤희에게>는 임대형 감독이 영화를 어떻게 만들려고 하는지에 대한 자세와 연출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했다. 사운드도 지나치게 튀지 않았고, 카메라의 시선처리도 잔잔했으며, 영화의 이야기 만큼이나 아름다운 컷들을 엿볼 수 있었다. 




윤희는 '참 외롭게 만드는 사람' 임과 동시에 '참 외로운 사람'이었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인생에 적당히 살아가야 했고, 현실에 순응해야 하는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대학을 갈 수 있었던 오빠와 달리 필름카메라 하나로 만족해야 했을 것이고, 가족 중 누군가가 짝지어주는 사람과 만난 적당한 결혼생활을 해야했을 것이다. 이것들을 모두 단순히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납득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시대가 또 사회가 그녀를 그렇게 만들어버리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녀의 시대를 완전히 통감하기는 어렵지만 보고 있으면 마음 한 켠이 아려오는 그런 인물이었다. <윤희에게>는 '여성'이라는 프레임을 윤희에게 씌워 그녀에게 동정을 느끼게 하고 그녀를 사회적 약자처럼 만드는 것이 아닌, 우리네 삶 속 '엄마'를 보면 알 수 있는 상투적인 인물로 만들어내 훨씬 깊은 공감력을 이끌어냈다.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깊은 후회와 죄책감으로 마치 그녀를 '여성'으로서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 사회적인 한 개인으로서의 면모를 더 보여주려 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헤어진 전 남편의 새로운 청첩장에도 '정말 잘 된 일이야' 하고 위로해줄 수 있는 그녀의 태도에서 알 수 있듯미 말이다.




영화 전개 속 가장 큰 재미는 그녀의 변화가 돋보이는 것이 아닐까 싶다. 푸석푸석한 머리, 퀭한 눈과, 움푹 페인 볼은 그녀가 진정 배우가 맞나 싶을 정도로 현실적이고 초췌한 모습을 보여준다. 짜증섞인 대답과 그저 의무적인 움직임들은 마치 불행한 일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비참하고 슬퍼보이기만 한다. 그런 그녀가 부쩍 일본으로 떠나고 말았을 때, 그녀는 더 이상 '엄마' 같지 않은 사람으로 바뀌게 된다. 딸 새봄과 함께하는 여행에서 담배를 태우기도 하고, 모르는 척 했던 사실을 툭 내뱉기도 하고, 일상보다 많은 대화를 나누며 웃기도 한다. 그녀만이 존재하는 공간에서 벗어나 그녀가 진정으로 '윤희'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녀는 스스로의 존재를 찾은 것 처럼 보였다. 그런 와중에 사랑하는 사람의 집 앞에 서성이고, 혹여나 들키게 될까봐 몸을 숨기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첫사랑을 추억하는 '소녀'와도 같았다. 마침내, 쥰과 마주하게 된 그녀의 눈물은 이전에 윤희가 흘리던 눈물과는 다른 그녀의 감정을 그대로 토해내는 듯 했다. 이처럼 처음 과정부터 결말까지 그녀의 모습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이 내게는 가장 흥미로운 관람포인트였다고 말하고 싶다.




새봄을 연기했던 김소혜 배우와, 엄마로서의 윤희를 연기한 김희애 배우의 케미를 보는 것도 개인적으로 즐거웠다고 말하고 싶다. 영화 전반부에서 보여줬던 모녀의 모습과 대비되는 후반부의 둘의 모습은 마치 둘도 없는 가까운 사이처럼 보이는, 영화의 분위기 자체를 훈훈하게 만들어주는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윤희의 첫사랑과 비교될만큼 풋풋한 사랑을 나누는 새봄과 경수(성유빈 분)의 모습 또한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점 중 하나였다. 10대들이 만나 어떻게 사랑하고 솔직한 감정에 어떻게 대처하는 지 비교해가며 보는 것도 영화의 주요 장치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처럼 주변 인물을 활용해 윤희를 다양한 모습으로 연출함으로서 인물 자체를 입체적으로 그려내려는 시도가 돋보였으나 메인 스토리에 묻혀 그 힘이 약간 부족하게는 느껴지긴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스토리를 윤희의 시점으로 그려냈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도 호불호가 갈릴 듯 하다. 하나, 개인적으로 한 인물의 감정을 세밀하게 묘사하는데에 집중했다는 점에 호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이런 것들이 숨겨져 있었구나' 느낄만큼 커다란 장치를 설계해놓진 않았으나 은연중에 전달하는 메시지들은 영화 자체에 대한 거부감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가 아니었을 싶다. 때문에 영화가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자극적으로 쏟아붓기 보다는 이런 은은한 표현방식이 더 마음에 들었다. 영화가 하고자 하는 말이 '여성의 시대상이 바뀌어야 한다', '성소수자를 존중해라'같은 거창한 것들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추억'이나 '감정,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후반부에 나레이션으로 잔잔히 흐르는 윤희의 낭독에서도 알 수 있듯 그저 '용기를 내고 싶었던' 한 사람의 입장으로서 사랑 앞에서 두려움 때문에 도망쳐야 했던 그 섬세한 감정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싶다. 영화의 장치가 동성애였지만 영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여기에 모두 뭉뚱그려 놓고 싶지는 않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사랑에 빠지고 되고, 강압과 통념에 의해 이별해야 했었던 그 마음을 그대로 이해하고 감동 받고 싶다. 지나치게 혐오스럽고 폭력적인 세상에서 스스로를 부정하고 속박하고 살았던 답답한 삶에서 벗어나 진짜 자신으로 돌아간 윤희가 '그래 그렇기도 했었어' 하고 조용히 마음을 대변해주듯이 말이다. 




차가운 겨울에 비해 '그립다'는 감정을 참 따듯하게 그려낸 영화였다. 눈물을 흘릴만큼 가슴 아프진 않았지만 보고 있으면 마음이 먹먹해지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옥죄던 환경에서 벗어나 딸의 필름카메라 앞에서 멋쩍게 웃어보이는 윤희의 모습은 영화에서 수없이 이야기 하던 '만월' 그 자체를 보는 듯 했다. 모습을 숨기기 급급했던 초승달에서 이제 용기를 내보겠다고 말하며 모습을 드러내는 만월처럼 말이다. 괜시리 사람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눈'처럼 누군가를 그리워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조금 부럽게 느껴졌다. 어느덧 태연해진 듯 하지만 만날 수만 있다면 가슴이 두근거려 말조차 내뱉지 못하는 그런 '눈' 말이다. 잠에서 깨고나면 수북히 쌓여버린 눈처럼 이 영화도 한참동안이나 마음 언저리에 가득 쌓여있지는 않을까 생각이 든다.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조금 여유를 두고 봤으면 하는 생각이다. 겨울에 보면 더 좋긴 하겠지만 너무 오래 남았으니까 그 느낌만 가지고 영화를 봐도 괜찮을 듯 하다. 배우들의 연기가 출중했으니 모자랄 바가 없고, 영화 속 볼거리가 많으니 이것저것 짚어가며 보는 것도 좋은 흥미거리가 되겠다. 5월, 오지도 않은 눈을 기다리며 한마디 해보고 싶다.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 하고 말이다.




사진 출처 : 윤희에게 . In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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