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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국범근 Aug 21. 2018

바르셀로나에서 사귄 여사친들과 소주로 노상 까기

썰이 빛나는 밤, 바르셀로나 (2)

<Un gusto conocerte, Sofia and Noa! >


♬ 울랄라 세션- 아름다운 밤 


바르셀로나는 장소가 아닌 얼굴로 기억될 것이다.

-

 이 도시에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길들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 주랑의 아치들이 어떤 모양인지, 지붕은 어떤 양철판으로 덮여 있는지 폐하께 말씀드릴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말씀드리는 게 아무것도 말씀드리지 않은 것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도시는 이런 것들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도시 공간의 크기와 과거 사건들 사이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로등의 높이와 그 가로등에 목매달아 죽은 찬탈자의 대롱거리는 다리에서 땅까지의 거리 사이의 관계, 그 가로등에서 앞쪽 난간으로 묶어놓은 줄과 여왕의 결혼식 행렬을 장식했던 꽃 줄 사이의 관계, 그 난간의 높이와 새벽녘 간통을 저지르다 난간을 뛰어넘는 남자의 급하강 사이의 관계, 창문 홈통의 기울기와 바로 그 창문으로 들어오는 고양이의 당당한 걸음걸이 사이의 관계, 곶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포함의 사정거리와 홈통을 파괴해 버리는 폭탄 사이의 관계, 어망의 찢어진 틈과 부두에 앉아 찢어진 어망을 손질하며 여왕의 사생아로 강보에 싸인 채 이 부두에 버려졌었다는 소문이 있는 찬탈자의 함선 이야기를 수백 번 되풀이하는 세 노인 사이의 관계로 도시는 이뤄집니다.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17p (민음사)


 람블라스 거리에서 웨이터 아저씨의 화려한 상술에 낚여 1인당 5만원에 가까운 저녁식사를 한 우리는 찝찝함을 한 가득 안은 채 해변으로 향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밥보다 비싼 2만 5000원짜리 모히또를 먹은 억울함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아서 석양을 배경 삼아 서로 열심히 인생샷을 찍어주며 놀았다.

(이러고 놀았다…)


 그 때 우리 옆에 있던 현지인 여자애 두 명이 자기들도 찍어달라며 다가왔다. 

소피아랑 노아와의 첫 만남이었다.  맨 위 사진에서 빨간 옷이 소피아, 하얀 옷이 노아다.


 사진을 예쁘게 찍어주고 난 뒤 대화를 시작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내 허접한 영어 실력이 큰 콤플렉스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진짜 소통의 수단으로 영어를 사용하려니까 어떻게든 통하기는 하더라. 나는 우리 팀의 공식적인 통역가가 되었다. 


 소피아와 노아는 한국 문화를 정말 좋아하는 친구들이었다. 특히 소피아. K- pop 보다는 한국 힙합을 좋아한다고 해서 신기했다. 양홍원, 넉살, 기리보이가 그녀의 최애. ㅋㅋㅋ


 아, 소피아가 나한테 스페인식 이름도 지어줬다. ‘Danny’. ‘대니'라고 발음하지 말고 ‘다니'라고 발음해야한단다. 답례로 나도 그녀에게 ‘한소영'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소피아의 ‘소'가 ‘소영'을 떠오르게 했고, 붉은 머리는 ‘한'씨에 어울릴 것 같아서. 노아에게는 ‘노영은'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이건 굳이 설명 안해도 되겠지. ㅋㅋ


 소피아에게 배운 스페인어가 한 가지 있다. 


Un gusto conocerte ’ 


(한국 발음으로는 '운 구스토 코노세르떼' 


 우리 말로 ‘만나서 반가워요!’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문장, 스페인 여행을 하는 내내 정말 잘 ‘써먹었다'. 스페인 사람에게 이 말을 하면 누구든 환한 표정을 지으며 화답해주더라. 소피아랑 노아를 다시 만나게 되면 꼭  ‘Un gusto conocerte’ 라고 첫 인사를 건네야지. 


아무튼 그렇게 'small talk'를 나누다 별 계획 없으면 같이 몬주익 광장의 분수쇼나 보러 가지 않겠느냐고 내가 제안해서 같이 움직이게 되었다. 


내 평생 그렇게 멋진 분수쇼는 처음이었다. 은은한 보랏빛 섞인 저녁 하늘에 다이아 반짝이듯 밝은 달이 떠 있고, 솜사탕 같은 물안개와 솟구치는 거대한 물줄기가 총천연색 조명을 받으며 환한 수채화를 그렸다. 몇 마디 말에 그 시공간을 어찌 다 담을 수 있을까. 궁금하면 그냥 직접 보러 가는 게 답이다.

(몬주익 분수 근처에 모인 인파)


 분수쇼를 관람하고 나서 다같이 간단히 술 한 잔 하기로 하고, bar로 이동했다. 사실 말이 좋아 bar지, 걔네 표현을 빌리자면 'Super cheap' 한 곳으로, 아마 우리네 삼구포차 비슷한 곳이었지 싶다. 소피아랑 노아 둘 다 한국나이로는 19살인 00년생이라서 술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어보니 이곳에서는 이미 법적인 성인이라 괜찮다고 했다. 


그럼 마셔야지! 레몬 맛 환타를 섞은 맥주 ‘Clara’를 시작으로. 앱솔루드 보드카와 데낄라를 살짝 알딸딸해질 때까지 마셨다. 안주는 'Truth or Dare' 술게임. 펜을 가운데에 놓고 돌려서 걸리는 사람이 질문에 대답을 하거나 벌칙을 수행해야하는 게임이다. 술게임이니만큼 수위는 살짝 ‘Spicy’하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 젤리플 카드게임의 창시자가 아니던가? 


“Who’s your worst ex?”

“What’s your sexual fantasy?”

“How inches your’s?”

“Dancing with tiwce’s song for 30 seconds!” 


등등… 


그 밖의 수많은 질문과 벌칙을 주고 받으며 놀다 보니 어느덧 새벽 2시가 거의 다 되었다.


스페인의 밤은 낮보다 귀하고 아름답다. 날이 밤 10시까지도 훤해서 하루의 시작도 늦고, 나이트 라이프가 매우 발달했기 때문이다. 그 친구들이 여전히 아쉽다길래 우리가 한국에서 가져온 소주를 먹기로 하고 근처 공터로 이동했다.


살다 살다 바르셀로나에서 현지인이랑 소주로 노상을 까게 될 줄이야... 소주에 콜라 섞고, 프링글스를 안주 삼아 한 시간 정도 더 같이 마셨다. 소피아는 그럭저럭 잘 마시는데 노아가 문제였다. 취하면 술 더 달라고 하는 전형적인 술자리 깡패 스타일.


내가 "노아야 추하다...  적당히 하자…." 라며 더 못 먹게 말리니까 노아는 잔뜩 업된 혀 꼬인 목소리로 "You are not my dad! I can drink!" 라고 계속 똑같은 대답만 반복했다.


이 곳에서 배운 또 한 가지. 자기가 취했는지 아닌지 애매할 때, 확실히 감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이 친구들은 이걸 ‘야따'라고 부르던데, 아주 간단하다. 우선 한 쪽 다리로 선다. 한 쪽 손을 엄지와 새끼손가락만 남긴 채 접는다. 새끼손가락을 접은 다리의 무릎에, 엄지손가락은 코에 닿도록 한다. 5초 이상 가만히 서 있을 수 있다면 아직 취한 게 아니다. 


“노아야 그거 해봐! 야따!” 

발그림 ㅈㅅㅈㅅ. '야따'를 하면 대충 이런 모습이 된다. 저 상태로 5초 이상 서 있어야 성공이다. 

 노아가 밟는 다이아몬드 스텝을 보며 헤어져야 할 시간임을 직감했다. 소주를 뺏으려고 폭주하는 노아를 겨우 진정시킨 채, 다음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일어섰다. 헤어지기 직전에 소피아에게 원래 우리가 오늘 클럽에 갈 예정이었다고 얘기하니까 내일이 축제일이니 같이 가자고 하더라. 어? 이렇게 타이밍이 절묘하다고? 오케이. 다음 날 12시에 카탈루냐 광장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일단은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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