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터의 끄적끄적 03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것

by 낭만지리 굴비씨



1.

저녁 나절, 장모님이 핸드폰을 쥔 채 눈물을 훔치며 방에서 나오셨다. 아내가 조심스레 들여다보니, 평소 각별하게 지내시던 친구분의 부고를 알리는 메시지였다. 아이 둘은 거실을 쿵쾅거며 뛰어다니고 있었고, 나는 혹여 아랫집에서 인터폰이라도 울릴까 봐 마음을 졸이던 참이었다. 그 소란스러운 일상 위로 툭 떨어진 '죽음'이라는 단어에, 내 마음도 무겁게 내려앉았다.

장모님은 이역만리 타국에서 손주들을 돌보느라 여기 와 계신다. 친구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러 갈 수 없는 처지가 못내 서러우셨던 모양이다. 그리고 짐작건대, 일흔다섯이라는 나이가 주는 무게감도 있었으리라. 친구의 부재가 결코 남의 일 같지 않다는 두려움, 그 자각이 낳은 회한이 노년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곁에서 그림을 그리던 첫째 딸에게 상황을 설명해주기로 했다. 아이라도 집안의 공기가 달라진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법이고, 어설픈 둘러대기보다는 솔직함이 낫다는 것이 내 지론이기 때문이다.

"외할머니 친구분이 하늘나라로 가셨대."
"하늘나라로 가는 게 무슨 뜻인지 알아?"
"나도 알지. 죽었다는 뜻이잖아."
"쉿, 어른한테는 죽었다고 하면 안 되고 돌아가셨다고 해야 해."
"그럼 왜 돌아가시는 거야?"
"밥을 많이 먹어서 그러나?"
"나이가 아주 많이 들면 누구나 떠나게 된단다. 엄마도 아빠도.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말이야."

2.

다섯 살 아이에게 죽음은 그저 낯선 '동사' 하나에 불과했다. 그것이 명백한 '현상'으로 다가와 일상에 '현현(顯現)'하기까지는, 나의 경험상 제법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아이의 천진난만한 질문을 뒤로하고 나는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산다. 하지만 그 명제는 너무나 당연해서, 마치 숨 쉬는 공기처럼 의식 밖으로 밀려나 있다. 세상의 모든 일은 반복하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라지만, 죽음만은 예외다. 그것은 겪으면 겪을수록 익숙해지기는커녕 점점 더 낯설고, 흉폭하며, 무겁다.

어릴 적에는 노인이 되면 누구나 자애로워지고 지혜로워지는 줄 알았다. 아마도 영화나 동화가 심어준 환상이었을 것이다. 중년의 문턱을 넘어보니 알겠다. 인간은 나이 듦에 따라 갑자기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기질이 더욱 뚜렷해지고 성격이 심화된 채로 살아갈 뿐이라는 것을.

그렇다면 나 역시 별수 없겠다. 훗날 노인이 된다고 해서 죽음을 초월하거나 관조하는 도인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수없는 이별을 겪고도, 나는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죽음 앞에서 오늘처럼 허탈해하고 두려워할지 모른다.

3.

장모님의 친구분도 어제까지는 '내일'을 계획하셨을 것이다. 다음 달의 모임, 내년의 여행, 혹은 며칠 뒤에 먹을 맛있는 음식 같은 것들을 떠올리며 잠드셨을지 모른다.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가 그렇다.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버나드 쇼의 말처럼, 우리는 늘 현재에 머물지 못한다.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거나, 오지 않은 미래를 대비하느라 정작 '지금 이 순간'을 유예한다. 나 또한 아이가 그린 그림을 건성으로 보며 내일 출근해서 해야 할 업무를 걱정하고, 먼 훗날의 안락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담보로 잡히며 살고 있지 않은가.

준비되지 않은 채, 살아보지 못한 채 맞이하는 끝. 그것이 가장 두려운 일이다. 거창한 자기계발서의 교훈이 아니라, 오늘 밤 장모님의 눈물이 내게 가르쳐 주는 것은 명확하다. 내일의 나를 위해 오늘의 나를 희생시키지 말 것.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소란스럽고 평범한 저녁 시간을 온전히 사랑할 것.

4.

밤이 깊어 아이들이 잠든 후, 장모님 방 앞을 지나쳤다. 문틈으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아마도 멀리 떠난 친구에게, 혹은 남겨진 친구들에게 보내는 조문 메시지를 쓰고 계시는 것이리라.

어차피 우리 모두 죽을 날을 받아 놓고 사는 시한부의 삶이다. 그렇다면 이왕 사는 거,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밀도 있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예고 없이 그날이 왔을 때, 적어도 내가 살아낸 날들에 대해 감사할 수 있지 않을까.

다섯 살 딸아이가 오늘 밤 꿈에서라도 '죽음'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느끼지 않기를 바란다. 아이가 그 무게를 온전히 이해해야 할 때까지, 우리에게 조금 더 긴 시간이 허락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먼 훗날 그때가 왔을 때, 그 아이 역시 삶이 나쁘지 않았다고, 살아온 모든 날이 고마웠다고 말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어쩌면 그것이 필멸의 존재인 우리가 죽음 앞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인간다운 저항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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