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터의 끄적끄적 09

시네마천국, 혹은 라디오천국

by 낭만지리 굴비씨



1.

20세기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던 1990년대 후반, 내 삶에는 별다른 드라마도 없이 평범한 고등학교 시절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까지도 가슴 한구석이 미묘하게 저릿하다.
락과 팝, 만화와 게임, 새벽 라디오와 비디오 영화—그 모든 것들이 당시의 나를 이루는 골격이 되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마 내가 살던 마을이 가진 묘한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방배동 건너편, 이수 쪽 재개발 지역을 사람들은 ‘정금마을’이라 불렀다. 버스 정류장 이름 때문이었는데, 이 작은 산동네는 바로 옆의 구반포나 방배 카페거리와 달리 문화적으로는 고립된 섬 같았다. 다세대 주택이 촘촘하게 붙어 있고, 조금만 더 오르면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곳도 있었다. 나도 그 골목은 끝내 가보지 못했다.
그곳은 서울 안에 있으면서도, 어른이 된 나는 종종 그 동네를 ‘내 첫 번째 외국’이라고 부르곤 한다.

2.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면서 우리는 순식간에 여러 집을 전전했다. 정원이 있던 집을 떠나 아파트로, 다시 영화 《기생충》의 반지하처럼 습기 찬 방으로. 유일한 차이라면, 우리는 정말로 위층 집주인의 발자국을 들으며 살았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다 결국 정금마을로 들어왔다. 걸어서 10분을 오르는 산동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가 구반포 주변을 벗어나지 못한 건 부모님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우리 삼형제를 동네 명문이라는 S고등학교에 보내려는 고집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나에게 ‘진학’이라는 말보다 ‘격차’라는 단어를 먼저 새겨준 공간이었다.

3.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가 화물차를 몰고 나를 학교 앞에 내려주셨다. 자율학습 시간, 누군가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야, 얘네 집 차 화물차래!”

부정할 수도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당시의 나는 집이 부끄러웠고, 아버지가 미안했고, 나 자신이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더욱 집에 가면 TV나 게임을 붙잡았다. 부모님이 늦게 들어와서 저녁 9시에야 온 가족이 모였고, 나의 밤을 지켜준 건 언제나 라디오였다.

그중에서도 새벽 2시에 흐르던 '영화음악' 프로그램.
동시통역사 출신 DJ가 요약해주던 영미권 영화 이야기들은, 내가 단 한 편도 보지 못한 영화들의 세계를 눈앞에 펼쳐줬다.
《저수지의 개들》을 처음 들은 날, 나는 바닥 맨 끝에 앉아 온몸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잊지 못한다.
라디오 불빛 하나가, 세상을 다 보여주던 시절이었다.

4.

우리 반에는 영화광 두 명이 있었다. 그들은 매주 최고의 영화를 선정하곤 했는데, 어느 날의 주제는 “1997년 현재, 가장 아름다운 영화는 무엇인가?”였다.
둘의 입에서 동시에 나온 대답—《비포 선라이즈》.

그날 나는 처음으로 비디오 가게에 혼자 갔다. 동네에는 두 곳이 있었는데, 한 곳은 비싸고 불친절했다.
다른 곳은 무허가 건물처럼 보였고, 내부는 더 허름했다. 그런데도 묘하게 마음이 갔다.
회원권 1만 원을 내면 몇십 편을 볼 수 있다는 이상한 시스템.
나는 주저 없이 1만 원을 내고, 《비포 선라이즈》를 손에 쥐었다.

그날부터 영화는 라디오와 함께 나의 또 다른 은신처가 되었다.

5.

나는 이때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스스로에게 가혹할 만큼 한 가지에 빠지는 성향을.
영화도 그랬다. 평일 한 편, 주말 세 편.
어떤 날은 홍콩 누아르에, 어떤 날은 조정래의 대하소설이나 무협지에 매달렸다.
어디로든 빠져들지 않으면 견딜 수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반 친구에게 좋은 감독을 추천해달라 했더니, 그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한 명이면 돼. 주성치.”

그 말 한마디로, 내 인생의 또 다른 문이 열렸다.
초기작, 누아르, 《마스크》, 《서유기》…
주성치는 그때의 나에게 정말 ‘신’이었다.
나는 그를 거쳐 홍콩 영화를 하나하나 정복해갔다.
어떤 영화는 지금 떠올려도 눈이 뜨겁고, 어떤 영화는 어린 나에게 너무 어두웠다.
그 시절, 영화들은 내가 보지 못한 세상의 다른 얼굴이었다.

6.

고3을 앞두고 부모님은 무척 불안해하셨다.
영화, 소설, 무협지.
성적은 바닥.
방황처럼 보였겠지만, 사실 나는 그저 ‘숨 쉬는 법’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비디오 가게에 갔다가 문이 텅 비어 있는 걸 발견했다.
간판도, 필름도, 사람도 없었다.
마치 한밤중에 통째로 뜯겨나간 집처럼.

나는 중얼거렸다.
“내 만 원…”

그렇게 내 시네마천국은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동네 도서 대여점도 더 이상 가지 않았다.
안경 쓴 여고생에게 어설프게 호감 표현을 했다가 민망해졌기 때문이다.
고3을 앞두고, 모든 것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마치 인생에서 처음 겪는 ‘커다란 빈자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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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고3이 된 뒤에도 나는 가끔 나 자신에게 작은 상을 주었다.
모의고사를 본 날이면 이수역 태평백화점 옆 작은 동시상영관에 가서 혼자 맥주를 마시며 영화를 봤다.
그 어둠 속에서만큼은, 아무에게도 미안하지 않아도 되었고, 잠시나마 세상과 화해할 수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꿈꿨다.
언젠가 이 시간이, 이 고단함과 어설픔과 외로움이 모두 아름다운 추억이 되리라고.

그리고 지금,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그 시절의 나는 서툴렀지만, 누구보다 진심으로 세상을 사랑하려고 했던 아이였다.

라디오와 영화, 그리고 외로운 내 방은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조용히 등을 받쳐주었다.

그 덕분에 나는 아직도,
어둠 속에서 스크린이 켜질 때의 그 작은 설렘을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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