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누가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가-

부제: 큐레이터의 일요일

by 낭만지리 굴비씨

1.


일요일 아침 일곱 시, 전시 공사 감독을 위해 일어나 출근하는 길은 쌀쌀한 날씨와 더불어 의기소침해지게 만듭니다. 예의 단팥빵 하나를 입에 물고 차를 몰아가는 길. 오늘은 또 무슨 일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목수 아저씨들과 작업실장님들을 만나고 감독을 하면서 전시실을 둘러봅니다. 8시. 모든 것이 시작되는 시간입니다. 관람객이 오시기 한 시간 전에 시끄러운 작업들을 하려 합니다.


9시. 영화에서처럼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지는 않았습니다. 고요는 십여 분간 계속되더군요. 그리고 한 팀, 한 팀씩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동쪽 태양이 정문을 비추며 들어오는 사람들을 소담히 반깁니다.


2.


밀린 전시 원고를 씁니다. 이번 전시는 87점의 소장품이 나올 예정이지만, 저는 각 소장품마다 어른들을 위한 심화 설명과 아이들을 위한 설명을 제 욕심껏 넣었습니다. 그리하여 실제 원고는 250여 편이 되어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형벌을 지우는 시지프스 같습니다.


세상에 지리지 전시는 80년간 열리지 않았었으니까요. 누군가는 알아주겠지요. 조금이나마.


팸플릿 원고도 고치고 또 고칩니다. 고치다가 이렇게 바보같이 일을 벌려버린 스스로에게 화를 냅니다. 87개 원고만 쓰면 그만이고 소장품당 3줄씩만 설명을 쓰면 되는데, 뭐가 잘난 게 있다고 혼자 남들 안 하는 것을 하냐고. 그렇게 스스로를 타일러 봅니다.


커피를 마십니다. 얼마 전 김해의 어느 선생님이 살뜰하게 챙겨주신 원두를 벌써 거의 마셔버렸습니다. 한 잔을 마시고 다시 두 잔을 연거푸 마십니다.


창밖에는 정오가 되었는지 햇살이 내리비치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옵니다. 이 잔을 내려놓으면 250편의 전시 설명과 패널카드, 팸플릿, 초청장 등등이 끝없이 몰려올 듯만 하여 자리에 앉기를 주저해 봅니다.


3.


잠시 다시 현장 감독 순찰을 돈다는 핑계로 원고를 팽개칩니다. 현장을 느릿느릿거리며 돌고 이곳저곳을 체크하며 나옵니다. 그러다가 박물관 중앙에 있는 미디어 월에서 춤추는 아이를 발견합니다. 스크린 속 나비가 날아오르면 아이도 팔을 펄럭입니다. 나비가 사라지면 아이는 화면을 두드리며 다시 나오라고 조릅니다.


저는 그 아이를 보고 눈을 떼지 못합니다. 일요일 오후, 못난 아빠를 둔 덕에 자기들끼리 놀고 있을 제 아이들을 떠올렸기 때문일까요? 스크린 앞에서 춤추는 아이들을 상상합니다. 왠지 그 아이의 머리 위로 빛이 쏟아지는 것만 같습니다.


그 옆으로 복도를 돌아가니, 그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젊은 커플이 보입니다. 둘은 너무나 흐뭇하게 웃고 있습니다. 얼마나 따스한 장면이던지.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도 아내와 그런 적이 있었지 하고 생각하게 하더군요.


어두운 문화사랑방 복도를 걸어가면서는 노래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어린 꼬마 공주가 피아노를 치고 있습니다. 작은 손으로 부모 옆에서 연주를 하다가 곧 곡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다음 아이는 조금 큰 남자아이입니다. 아이는 또다시 많이 들어본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합니다.


저는 피아노를 치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참고 다음 사람에게 순서를 넘겨줍니다.


4.


제가 걸어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박물관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오전과는 다른 분위기. 그것이 바로 이 하루를 기다린 보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20여 일을 더 전시를 위해 기다려야 하는 이유가 된다는 것도요.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빨리 자리에 앉고 싶어졌습니다. 원고를 마저 쓰려고요. 그래야 했습니다.


저는 오늘 새삼 보았습니다. 미디어 월 앞에서 나비를 쫓는 아이를, 그 아이를 바라보며 웃는 커플을, 서툰 손으로 건반을 두드리는 아이들을. 그들은 제가 쓴 250편의 설명문을 읽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조선시대 각 지역의 지리와 풍속을 담은 지리지가 80년 만에 다시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도 모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공간에 있습니다. 춤추고, 웃고, 연주하면서. 그리고 저는 압니다. 제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스스로에게 물어 봅니다.


"누가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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