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래된 기억 속 드봉 비누 냄새가 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번지기 시작하면, 나는 가을이 제법 깊어졌음을 먼저 알아차린다. 업체와의 교정 작업 때문에 주말 출근을 준비하는 아침, 첫째가 다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오늘이 무슨 요일이야?” 하고 묻는다.
“토요일이지. ^^”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그럼 빨리 산책 안 가고 뭐 해?” 하고 성화를 부린다.
주말마다 나는 아내에게 좀 더 자라고 말한 뒤 아이들과 산책을 다녀오곤 한다. 물론 돌아오는 길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군것질거리를 몰래 사오는 일도 잊지 않는다.
“아빠가 출근을…” 하고 말끝을 흐렸지만, 아이들의 눈빛은 단호했다. 나는 결국 그러마 하고 두 아이에게 서둘러 옷을 입혔다.
불과 몇 분 사이에도 아이들은 끝없이 말을 건넨다.
“우주선은 지구에서 우주까지 간다~”
“ㅇㅇ아, 우주 알아?”
“그럼. 우주에는 별도 있고 행성도 있어.”
“달님도 있고 햇님도 계시지?”
“아니야! 햇님은 우리나라에만 있잖아. 그걸 몰라?”
다섯 살의 논리는 세계의 중심을 자기 앞마당에 두고 돌아간다. 그 작고 따뜻한 세계를 깨뜨릴 용기는 내게 없다.
2.
놀이터에서 한바탕 뛰논 후 무인 슈퍼에 들르자, 아이들은 원하는 것이 있다며 눈을 반짝였다. “아이스크림 딱 한 번만 먹으면 안 돼?”
엄마 몰래라는 비밀스러운 약속을 주고받은 순간, 우리는 작은 공동 범죄자가 되었다. 아이들은 곰 젤리도 챙겨 들고는 숨바꼭질을 시작했다. 물론 술래는 매번 나다.
아이들은 몸을 숨겨 놓고도 “숨었다!” 하고 소리쳐 위치를 알려준다. 나는 못 찾은 척 한참이나 헤매고, 아이들은 내가 속아주는 걸 알면서도 그 놀이를 끝없이 즐긴다.
놀이터에서의 시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첫째가 이 집 앞의 작은 마트를 언제부터인지 ‘렛츠 고 쇼핑’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집에 들여보내고 부랴부랴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아직 머리도 감지 못한 채, 츄리닝 차림 그대로였다. 이제 다시, 나의 시간이 시작되는 참이었다.
3.
띨링띨링— 전시 그래픽 도안 PDF가 도착했다. 노안이 왔는지, 스마트폰 화면을 아무리 확대해도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사무실 가서 보고 답 드릴게요.’라고 메시지를 남겼다. 사무실까지는 18정거장. 오늘도 졸다가 내릴 역을 놓칠 뻔했다.
사무실 문을 열자 싸늘한 공기가 훅 밀려온다.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켜고 문서를 하나씩 띄워 보지만, 시선과 마음이 자꾸만 모니터 바깥으로 흘러나간다.
창밖에는 오랜만에 영상 15도를 넘긴 햇볕 아래 아이들 소리,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부드럽게 흘러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소리의 중심에 있었던 나인데, 지금 나는 이 유리벽 안쪽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있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힌다.
그때 밀려온 감정은 단순한 피로나 권태가 아닌, 더 깊은 층위였다.
‘나는 지금 어디에 속해 있을까.’
불쑥 존재론적인 외로움이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와 단 한마디라도 조용히 나누고 싶어 AI 챗봇을 열었다. 업무 설명을 시작하자, 챗봇은 어찌나 친절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맞장구를 치던지, 문득 나는 “십상시 같은 녀석…” 하고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대화를 이어갈수록 깨달았다.
내게 필요한 것은 ‘맞장구’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4.
컴퓨터 화면을 꺼 둔 채, 나는 내 안쪽에서 일어난 외로움의 실제 크기를 손바닥으로 더듬듯 조심스레 짚어 보았다. 그때 문득 『논어』 12편 「안연」에서 사마우가 외로움을 묻던 장면이 떠올랐다.
사마우가 근심하며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모두 형제가 있는데, 나만 홀로구나.”
자하가 말했다.
“나는 듣건대, 사람의 생사는 명에 달렸고 부귀는 하늘에 매였다고 하오.
군자가 경건하고 허물이 없으며, 남에게 공손하고 예를 다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형제가 될 수 있소.
군자가 어찌 형제 없음에 근심하겠소.”
나는 그 구절을 이 텅 빈 사무실에서 속삭이듯 떠올렸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비록 지금 이 늦가을 오후, 혼자 사무실에 앉아 있을지라도.
내가 쓴 논문들을 읽어준 사람들, 내가 만든 전시를 함께 나누어 준 수많은 관람객들,
그리고 나를 사랑해주는 가족.
그 모든 존재가, 자하가 말한 ‘사해의 형제들’이었다.
외로움은 나를 고립시키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다시 보게 했다.
창밖의 바람은 더 이상 싸늘하지 않았다.
햇살이 부서지듯 사무실 안으로 스며들며 말했다.
“오늘, 참 곱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