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식을 뒤집는 지도
스마트폰 지도 앱을 켜봅니다. 화면 위쪽은 당연히 북쪽(N)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지도의 위쪽은 북쪽, 오른쪽은 동쪽"이라고 배웠고, 이것을 불변의 진리처럼 여깁니다.
하지만 박물관에서 옛 지도를 보다 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어라? 이 지도는 왜 거꾸로 되어 있지?" 글씨도 뒤집혀 있고, 산과 바다의 위치도 우리가 아는 것과 정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조선 시대에 그려진 '제주도 지도'들이 그렇습니다.
육지에서 그린 제주도 지도는 대부분 위쪽이 북쪽입니다. 한양에 계신 임금님이 남쪽의 섬을 내려다보는 시선이지요. 그런데 제주도 현지에서 그려진 지도 중 상당수는 위쪽이 '남쪽'입니다. 육지 사람인 우리가 보기에는 '거꾸로 된 지도'지만, 제주 사람들에게는 이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지도'였습니다.
도대체 왜 옛사람들은 남쪽을 위로 그렸을까요? 단순한 실수였을까요,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깊은 뜻이 숨어 있을까요?
2. 산이 우리를 굽어살피시니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 시대 사람들의 '공간 감각'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지도는 단순한 길 찾기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땅의 기운을 읽고, 마을의 질서를 잡는 '풍수지리의 그림'이었습니다.
그 중심에 '진산(鎭山)'이 있습니다. 진산은 단순히 '가장 높은 산'이 아닙니다. 고을의 뒤편에 든든하게 자리 잡고 앉아, 나쁜 기운을 막아주고 마을을 굽어살피는 수호신 같은 산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뒤에서 안아주는 형상, 혹은 튼튼한 의자 등받이 같은 존재지요.
옛사람들은 이 진산이 마을을 내려다보는 구도를 가장 안정적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지도를 그릴 때도 진산을 위쪽(상단)에 배치했습니다. 그래야 산의 기운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려 마을을 감싸 안는 그림이 완성되니까요.
3. 한라산, 제주의 영원한 진산
제주도의 진산은 두말할 것 없이 '한라산'입니다. 섬 한가운데 우뚝 솟은 이 거대한 산은 제주 사람들에게는 산 이상의 존재, 곧 신(神)입니다.
제주도의 행정 중심지였던 제주목(지금의 제주시)은 한라산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제주목 관아에서 고개를 들어 보면, 남쪽에 있는 한라산이 웅장하게 버티고 서 있습니다. 제주 사람들에게 세상의 중심은 한라산이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한라산은 당연히 머리 위, 즉 지도의 위쪽에 있어야 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탐라지도병서(耽羅地圖竝序)>를 보십시오. 지도의 위쪽(남쪽) 한가운데 한라산이 왕처럼 앉아 있습니다. 그 아래로 오름들이 신하처럼 조아리고, 그 더 아래쪽에 관아와 마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맨 아래쪽(북쪽)에는 바다가 펼쳐집니다. 이것은 한라산이 섬 전체를 품에 안고 바다를 향해 호령하는 모습입니다. 제주 사람들의 마음속 지도는 바로 이런 모양이었습니다.
4. 임금님의 시선 vs 도민의 시선
물론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학계에서는 이를 '임금 시각설'이라고도 부릅니다. "모든 지도는 임금님 보시라고 만드는 것이다. 임금님은 북쪽(한양)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시니, 지도도 당연히 남쪽이 위로 가야 보시기 편하다."
일리가 있습니다. 충청도나 경상도의 지도 중에도 남쪽을 위로 그린 것들이 꽤 있으니까요. 중앙 집권 국가였던 조선에서 지방의 정보는 한양으로 모여야 했고, 지도의 형식도 그에 맞춰 규격화되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한라산 진산설'에 좀 더 마음이 기웁니다. 임금님의 편의를 위해서라기엔, 제주도 지도 속에 담긴 한라산에 대한 경외감이 너무나 큽니다. 단순히 방위만 돌려놓은 것이 아니라, 한라산을 실제보다 훨씬 크고 웅장하게 과장해서 그렸거든요. 이것은 "임금님, 보십시오. 우리 한라산이 이렇게 위대합니다"라는 제주 사람들의 자부심 표현이 아니었을까요?
또한 경상도 청도(淸道)의 지도에서도 남쪽에 있는 화악산을 위쪽에 그렸고, 전라도의 어떤 고을은 동쪽에 있는 산을 위쪽에 그렸습니다. 이것은 방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을을 지켜주는 산이 어디에 있는가?"가 지도 제작의 기준이었음을 보여줍니다.
5. 에필로그: 지도는 마음의 눈으로 그린다
결국 조선의 고지도는 '객관적인 측량의 결과물'이라기보다 '주관적인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위쪽이 북쪽이다"라는 현대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옛 지도를 다시 봅니다. 그러면 그 속에 담긴 옛사람들의 마음이 보입니다.
자연을 정복하거나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우리를 지켜주는 든든한 배경으로 여겼던 겸손함.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아늑함. 제주도 고지도가 거꾸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가 자연을 바라보는 눈을 잃어버리고 거꾸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한라산 꼭대기를 지도의 정수리에 이고 살아갔던 제주 사람들. 그들의 지도에는 험한 바다 한가운데서도 든든한 산을 믿고 의지했던 섬사람들의 간절한 기원이 담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