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전 겨울, 커다란 배낭 하나만 들고 떠났던 한 달간의 유럽여행에서 나는 떠나는 날짜와 표 외에는 아무것도 정해두지 않았다. 몇 백 달러 남짓한 돈으로 한 달을 버텨야 했기에 모든 기차를 탈 수 있는 학생용 '유레일패스 30일권' 하나만 믿고 이동했고, 밤에는 기차 좌석에서 잠들곤 했다. 12월에서 1월로 이어지는 가장 깊은 비수기, 날씨는 늘 비 아니면 눈이었다.
INFP 특유의 직관적인 여행이었다. 느낌이 오면 며칠이고 머물렀다. 함께 묵던 독일 친구가 떠나고 혼자가 되자 여행은 더욱 자유로워졌다. 오스트리아에서 만난 낯선 여행자가 '프라하에는 꼭 가보라'며, "그곳에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말했다.
원래는 하루만 머물 생각이었다. 그러나 첫날 카프카의 집을 찾고, 언덕 위 '프라하성'을 올려다본 뒤, 서점에서 그의 미완성 유작 『성(The Castle)』을 펼쳐드는 순간 마음이 바뀌었다. 낮에는 카프카의 집을 들르고 저녁이면 성으로 향했다. 매일 미사를 드리듯 그곳을 오르내리며, 끝내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높은 곳을 바라보는 K의 시선을 따라 나 역시 이야기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카프카의 '성'과 같은 존재를 만나게 된다.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로는 쉽게 닿을 수 없는, 경외에 가까운 존엄함을 풍기는 사람들 말이다.
나에게는 양보경 선생님이 그러했다. 학부 시절부터 이름을 들었지만, 석사 과정에서 선생님의 전설적인 박사논문을 읽고부터는 그 이름이 일종의 '성'처럼 느껴졌다. 저술이 많지 않아 논문 몇 편을 통해 그분의 학문 세계를 짐작할 뿐이었다.
학회에서도 늘 멀찍이 서 있었다. 여러 선생님들 사이에 둘러싸여 계셨기에, 나 같은 젊은 연구자가 감히 인사를 건네기란 쉽지 않았다. 전공 분야도 달랐고 여대 수업이었기에, 선생님의 강의를 직접 듣는 일은 더욱 요원해 보였다. 접근은 늘 가능성만 남긴 채 닫혀 있는 듯했다.
몇 해 전 대중 강연에서 선생님을 뵐 기회가 있었지만, 현장 분위기가 어수선해 강연이 일찍 끝나버렸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아, 나와 선생님의 수업 인연은 여기까지인가.' 사숙(私淑)이라는 말처럼, 멀리서 마음으로만 배우는 방식도 나쁘지 않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그러던 중, 이번에 개최된 국립대구박물관 전시 〈사람과 땅, 지리지에 담다〉에서 선생님이 자문위원으로 참여하시면서 뜻밖의 인연이 닿았다. 지리지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본격 연구하신 분다운 통찰과 정확함이 전시 곳곳을 비추는 것을 보며, 나는 비로소 '성'의 문턱이 열리는 기분을 느꼈다.
카프카의 K는 끝내 성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나는 드디어 그 높은 성 안으로 들어가는 환대를 받게 되었다. 바쁘신 중에도 선생님께서 12월 중순에 공개 특강을 해주시기로 한 것이다. 예약만 하면 누구나 들을 수 있어, 더 많은 분들이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지식을 체득하는 데에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고 한다. 스스로 깨닫는 방식이 가장 오래 걸리고, 책을 통해 배우는 것이 그다음이며, 가장 빠른 길은 누군가에게 직접 듣는 것이다. 지리지 연구만 50년을 이어온 대한민국 최고 학자가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강연이라면, 그 두 시간 동안 우리는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강연 제목은 단호하면서도 울림이 있다.
"지리지의 나라, 조선"
22년 전 프라하의 겨울처럼, 이번에도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다. 보다 많은 분들이 함께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