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4일 아버지는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곧장 서울역으로 왔다. 기차를 타고 시골 고향 집으로 가기 위해서다. 서둘러도 오늘 안으로 남쪽 끝 강진의 바닷가 마을 고향 집에 도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기차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에 광주에 도착하면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몇 시간을 달려가야 하고 버스에서 내리면 또다시 10리 길을 걸어가야 집에 도착할 수 있다. 나라 전체가 가난하고 교통은 발달되지 않아 기차라고 해봐야 완행열차가 ‘칙칙폭폭 칙칙폭폭’ 느릿느릿한데다 기찻길은 외길이라 상행선과 하행선이 교차할 때는 역에서 한참 동안 정차했다가 가곤 했던 시절이다. 요즈음 KTX 기차에 비하면 마치 옆집에 마실 가듯이 느려터진 속도로 산과 들판을 지나갔을 것이다. 그때로서는 멀고 먼 여정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아직 여름방학은 한 달이나 남았다. 그런데도 부득부득 집에 가려고 하는 데는 간절한 사연이 있었으니 그것은 배고픔 때문이었다. 한창 잘 먹고 잘 커나가는 왕성한 시기에 두 끼로 하루를 때우기 일쑤였다. 하루 네 끼를 먹어도 시원찮을 나이에 두 끼로 매일매일 하루를 버티다가 드디어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수중에는 돈도 떨어지고 배는 고프고 겨우 기차표만 구해서 갈 수 있었다. 배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꼬르륵꼬르륵’ 소리가 났다고 한다.
아버지가 천신만고 끝에 집에 도착하니 할아버지랑 할머니랑 아버지의 형제인 큰아버지, 고모들, 가족들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그중에 한 사람만은 매우 당황해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생활비를 보내라며 큰아버지에게 돈을 주었는데, 큰아버지는 직접 우체국에 가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주었고 그분은 그 소중한 돈을 써버렸던 것이다. 또한 아버지는 서울에서 할아버지의 동생인 작은할아버지 집에서 침식을 하며 학교를 다녔는데, 작은할머니가 아버지에게 밥을 주지 않아서 굶을 때가 많았다고 한다. 작은할머니는 밥을 주지 않고 용돈은 중간에서 가로채었으니 아버지는 밥도 끊기고 돈도 끊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고향 집에 내려온 날 저녁 무렵 동네 이장은 마을 사람들에게 북한군이 탱크로 38선을 밀고 들어와 서울까지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알렸다. 공교롭게도 아버지는 6 ·25 한국전쟁을 피하여 하루 전날 미리 피난을 오게 된 셈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하여 서울에서 전쟁을 맞닥뜨리지 않았지만 학업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전쟁은 아버지가 꿈꾸었던 꿈과 희망을 물거품으로 만들었으며 오래도록 아버지를 괴롭히고 절망하게 했다.
6·25 한국전쟁은 중공군이 개입함으로써 전세가 불리해지고 후퇴하기 시작하였고 아버지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낙동강전투 중에 지뢰 파편을 맞아 다리에 부상을 입고 부산 국군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지혈이 늦어져 생명이 위태로웠다. 다행히 오랜 투병 끝에 부상에서 회복이 되어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퇴원은 하였지만 몸은 예전 같지 않고 여러 가지 후유증으로 몸이 아프고 쇠약해졌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서울에서 학업을 계속할 수도 없었다. 이제 서울에서 숙식하며 지낼 곳도 없었고 시골 형편으로는 아버지를 뒷바라지해 줄 여력도 없었으며 아버지 역시 건강한 몸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학업을 포기하는 대신 초등학교 교사를 위한 단기간의 사범학교를 다녔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평생 시골 고향에서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그러나 아이들을 가르치는 수업시간 중에도 어지러움으로 쓰러지기도 하여 병원에 실려 가는 일이 잦았다. 아버지는 항상 어딘가가 아팠고 항상 약이 곁에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건강이 조금 좋아진다 싶으면 아버지는 무슨 책인지 책을 읽고 공부를 했다. 나중에 내가 아버지의 책을 살펴보니 그 책들은 국가가 시행하는 고등고시 시험 준비 서적들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포기했던 것 같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공부를 병행하기에는 건강이 뒷받침되지 않았다. 아버지도 힘들었지만 어머니도 아버지를 뒷바라지하느라 힘들어하셨다. 어머니는 항상 아버지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고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을 해 주느라 애썼다.
아버지는 호기심이 많고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도해 보는 것을 좋아하였다. 남들이 미처 생각해 내지 못한 아이디어를 내고, 그것을 만들거나 일을 벌이기를 자주 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가 불만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당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젊은 시절 품었던 높은 꿈과 기대를 펼쳐 보이지 못한 아쉬움과 실망감, 그리고 결핍감이 아버지를 공허하게 하고 괴롭혔을 것이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보충하기 위한 아버지의 아픔이 그 노력들 속에 숨어 있었다.
아버지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퇴근하여 남는 시간이나 공휴일에 꼭 뭔가를 하였다. 몸이 피곤할 텐데도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이니 덜 힘들었던 모양이다. 꿀이 몸에 좋다고 하여 직접 꿀벌을 치기도 했다. 처음에는 꿀벌 한 통을 사 와서 시작했는데 매 해 봄이면 분봉(分蜂-꿀벌이 새끼를 낳아 수가 많아지면 새로 태어나는 여왕벌을 남기고 기존 여왕벌이 일벌 일부와 함께 집을 나가는 현상)을 하여 꿀벌은 해마다 늘어나 한때는 10통이 넘는 꿀벌을 키우기도 했다. 논농사와 밭농사도 조금씩 지었으며, 단감 재배가 막 보급되는 시기에 과수원을 만들고 감나무 묘목에 우수한 단감나무 접을 붙여 단감을 100그루나 재배하기도 했다. 야산에 밤나무도 심어서 밤도 따서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유자나무도 집 텃밭에 십여 그루 심어 유자를 따서 먹기도 하고 팔기도 하고 나누어 먹기도 하였다.
학교에서는 당신이 직접 그림을 그려서 교실 환경정리를 하였다. 아버지는 그림 공부를 전문으로 받은 적이 없지만 그림을 잘 그렸다. 글씨도 잘 쓰고 손과 머리를 써서 하는 모든 것을 잘했다. 운동도 잘해서 나는 방학이면 아버지 학급 교실에 있는 탁구대에서 아버지로부터 탁구를 배웠다. 또 철봉에 매달려 공중에서 한 바퀴씩 도는, 당시에 기계체조라고 하는 재주를 부리기도 하셨다. 재주 많고 총명하여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농사일이나 무슨 일을 하든지 재기가 반짝거렸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아버지와 나는 같은 학교에서 나는 학생으로 아버지는 선생으로 있었다. 그 초등학교는 꽤 높은 산 밑에 자리하고 있었다. 산에서는 계곡물이 흘러 학교 옆으로 흘러내렸다. 아버지는 그 계곡물을 이용하여 학교 한쪽에 분수를 만들었다. 계곡물의 낙차를 이용하면 모터를 이용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물이 솟구칠 수 있는 멋있는 분수가 되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우리 아버지가 만들었다고 자랑을 하곤 했다. 이 밖에도 미처 기억해내지 못할 만큼 많은 일들을 벌이고 손수 해내었다. 나는 맏아들로서 아버지가 하는 일을 거들어야 했다. 때로는 혼나며 귀찮아해 하며 따라 하다 보니 아버지가 했던 일들을 소상히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매사에 정직하며 올바른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학부모들이나 마을 사람들은 선생님이라 부르며 훌륭한 교육자로 인정하였다. 시골 고향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농사를 짓고, 벌을 치고, 자연과 함께, 농부들과 함께 소박하게 살아가는 것이 어느덧 아버지의 삶이 되었다. 14살의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서울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며 가졌던 청운의 뜻은 어디로 간 것일까. 아버지는 아들 딸 여덟을 낳고 열 식구 대가족을 이루며 자족하며 살아가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나이가 40이 넘어가면서 건강도 조금씩 좋아지고 마음도 많이 편해져서 웃는 모습이 많아졌다. 학교 동료 선생님들은 모두 객지에서 와서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선생님들을 초대해서 음식을 대접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중에서도 한 여름 팥죽을 한 솥 가득 쑤어 놓고 선생님들을 부르면 별 특별하지도 않은 음식이지만 매우 맛있게 먹고 행복해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객지에서 외롭게 지내는 선생님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흐뭇해하였다. 아버지가 늦게나마 소소한 행복을 찾고 생활하기까지는 많은 것을 단념하고 시대를 한탄하며 보낸 아픈 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하고자 하는 일은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남도 끝자락 강진에서 서울로 가서 남의 집을 전전하며 중학교를 다니게 된 것도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자신감과 영특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벌써 서당에 다녔다. 아버지의 4살 위의 형인 큰아버지가 서당에 다니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형을 따라가서 서당 마당에서 흙장난을 하며 혼자 놀았다고 한다. 얼마 지난 뒤에 매일 혼자 마당에서 놀고 있는 아버지를 본 서당 훈장이 아버지에게 너도 방에 들어와 앉으라고 하면서 맨 끝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아버지는 나이가 훨씬 많은 형들을 제치고 제일 먼저 ‘하늘 천, 따 지, 가물 현, 누루 황’ 하는 천자문을 제일 먼저 깨치고 실력이 월등하였다. 그러자 훈장 선생이 놀라서 할아버지에게 하는 말이 “이 놈은 보통 놈이 아니니 반드시 서울로 학교를 보내시오.” 그리하여 초등학교는 시골에서 졸업을 하고 중학교를 그 어려운 유학 아닌 유학을 서울로 가게 된 것이다.
6·25 한국전쟁은 아버지의 꿈과 가족들의 기대를 꺾어버렸다. 전쟁으로 인해 아버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거나 이산가족이 되어 평온한 삶이 파괴되었다. 살아난 사람들은 다시 자신의 삶을 찾아 어떻게든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새로운 꿈을 꾸며 살아갔다. 아버지도 마찬가지로 학창 시절의 꿈은 펼치지 못했지만 한 사람의 남편으로 그리고 아버지로, 학생들의 스승으로 고단한 삶을 묵묵히 살았다.
전쟁이 끝나고 7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났고, 아버지가 세상을 뜬 지도 16년이 지났다. 현충일과 6·25 한국전쟁 기념일이 있는 6월이 오면 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호국원 국립묘지에 간다. 아버지는 지금 편안하신지. 그리고 아버지는 지금은 무슨 꿈을 꾸고 계실까. 아버지의 꿈과 같은 꿈은 아닐지라도 우리 아들딸들은 각자의 꿈을 꾸며 아버지와 닮은 모습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의 꿈은 우리의 가슴속에 살아있고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며 아버지가 원하던 세상을 위해 자신의 일에 충실하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지켜보며 말없이 웃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