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눈물
얼마 전 시골 고향집에 갔을 때였다. 동네 이장이 확성기로 안내 방송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내일 점심때 우리 마을 선재와 강재 모친인 문○○ 여사님의 팔순 잔치를 집에서 하신다고 하니 주민 여러분은 한 분도 빠짐없이 참석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선재, 강재는 우리 집에서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는 가까운 이웃에 살았다. 나보다는 열 살쯤 적었다. 선재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는 매우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다. 나는 그분을 맹기 아저씨라고 불렀다. 이름이 명기인데 사람들이 이름을 부를 때는 맹기로 들려서 나도 그렇게 불렀다. 그분의 나이도 우리 아버지보다 열 살쯤 아래였다. 맹기 아저씨는 품성이 어질고 부지런하고 성실하기로 마을에서 알아주는 착실한 농부였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선생을 하면서 논과 밭을 조금 가지고 있어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틈나는 대로 농사일을 하여야 했는데, 농사일이 어려운 아버지가 맹기 아저씨에게 일을 부탁하곤 하였다. 그분은 일을 하면 내 일처럼 꼼꼼하게 잘해 주어서 우리는 항상 마음이 든든하였다. 아버지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고마운 분이었다. 그런데 나이 50살쯤 평소 건강하던 아저씨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저씨의 가족은 말할 것 없고 우리 가족들도 망연자실하였다.
선재 어머니 역시 일 밖에는 모르는 전형적인 농부의 아내로서 부지런하고 억척스럽게 살았다. 맹기 아저씨가 돌아가시자 선재네 아주머니는 더욱더 억척스럽게 일했다. 남편이 이른 나이에 자식을 세 명이나 남겨두고 세상을 떴으니 얼마나 앞이 깜깜했을까. 어느 날, 해가 지고 어스름한 저녁 무렵 밭에서 일하고 집으로 돌아온 선재네 아주머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담장 너머로 들려왔다.
“쇠죽 쒀서 소 밥 좀 주랑께는 소밥은 안 주고 그라고 자빠졌냐? 어따 이 썩을 놈!”
아마도 밭에 일하러 가면서 집에 있는 선재에게 쇠죽을 쑤라고 했는데 방에 그냥 누워 있었던 모양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주머니는 좀체 목소리를 낮추지 못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오매오매 저 문딩이 같은 놈들 언제 사람이 되까잉 내가 참말로 못 살것다.”
선재, 강재는 아무 말이 없다.
“저것들을 어따가 써 먹으까잉 참말로.”
나는 시골에서 중학교를 마치자 고등학교부터는 도시로 갔다. 내 뒤를 이어 동생들 모두 도시로 갔다. 학교를 마치고는 모두들 당연한 것처럼 도시에 터를 잡았다. 시골로는 아무도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선재, 강재도 도시로 갔다가, 다시 시골로 왔다가, 다시 갔다 왔다 하더니 언제부터인가 어머니를 모시고 잘 살고 있다. 아주머니도 지금은 편안해지셨는지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많이 늙으셨으니 목소리 높일 일도 없을 테고 선재, 강재가 열심히 소도 많이 키우고 농사도 잘하고 있는 모양이다.
16년 전 아버지는 시골집에 어머니를 남겨 두고 세상을 뜨셨다. 어머니는 덩그러니 시골집에 홀로 남았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혼자서도 잘 지내는가 싶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5, 6년쯤 되었을 때부터 점점 말이 없어지기 시작하였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우울증이라고 하였다. 노인들에게 오는 우울증은 대부분 치매로 발전한다고 한다. 어머니도 그랬다. 뇌 사진에는 신경세포 소실이 진행되고 있었다. 어머니의 병은 외로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홀로 남겨져 대화할 상대가 없으니 뇌를 사용할 일이 줄어들고 더불어 뇌세포가 활성화되지 않자 세포가 급격히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가까이 살던 동생이 어머니를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갔으나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결국 어머니는 광주의 요양병원으로 가시게 되었다.
광주에 사는 동생들은 매일 어머니 면회를 갔다. 반찬을 만들고 과일과 간식을 가지고 가며 정성을 다했다. 그런데 코로나19 사태로 한동안 면회를 할 수 없게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면회가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경기도에서 광주까지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면회를 자주 가지 않았다. 내 몸이 자주 아프기 시작하자 면회 가는 일이 더욱 어려워졌다. 왕복 10시간 이상 운전을 하여야 하는데 ‘그 썩을 놈의 고속도로는 왜 그리도 막히는지!’ 차 막히고, 시간 오래 걸리고, 몸 아프다는 핑계로 점차 면회 가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어머니는 오랜만에 오는 나를 보면 보자마자 퍽퍽 울어버린다. 그 수많은 날들, 얼마나 보고 싶고 얼마나 외로웠을지 모른다. 울음은 좀처럼 쉽게 그치질 않는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마냥 울다가는 지쳐서 슬며시 잠이 들어 버린다.
아들딸들, 젊은이들은 시골을 버리고 부모를 버리고 너도 나도 도시로 도시로 갔다. 남겨진 늙은 부모들은 서로 의지하며 살다가 한쪽이 먼저 세상을 뜨면 물건처럼 덩그러니 그 자리에 남겨진다. 농촌 마을에는 대부분 노인들이고 밭에는 풀이 무성해지고 있었다. 도시로 간 그 젊은이들이 지금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모른다. 나 역시 그 젊은이들의 한 사람이었다. 부모는, 고향은 나를 낳고 키웠는데 나는 그들을 외면하였다. 원대한 꿈을 이룬 것도 아닌데 소중한 사람, 소중한 산과 들과 마을, 그리고 따뜻한 마음들을 잃어버렸다.
선재와 강재는 시골집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오순도순 티격태격 정겹게 살고 있다. 어렸을 적 선재네 아주머니는 우리 어머니를 썩 부러워하였다. 우리를 보면서 자식들이 다 착하고 공부도 잘한다고 칭찬하면서 이렇게 한탄하였다.
“썩을 놈의 새끼들이 공부를 못하면 말이라도 잘 들어야제.”
그러나 지금 부러워하는 사람은 선재네 아주머니일까? 우리 어머니일까? 나는 대답할 자신이 없다.
나는 어머니가 눈에 밟혀 팔순 잔치에는 차마 참석할 수가 없었다. 선재, 강재가 아주머니와 함께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며 동네를 등지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