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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몽수 Dec 01. 2019

공동명의로 글을 썼다

마음을 하나로 모으면 슈퍼파워가 생긴다

자동차 사이드미러에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가 있듯,

그래서 보조거울을 쓰는 운전자가 있듯,

생각이나 글에도 스스로 보지 못하는 맹점이 있다.

문제의 본질에 천착하려면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들여다봐야 하지만, 쉽지 않다.


자신이 쓰는 이야기나 인물에 함몰되어 더 이상 글이 안 풀릴 때,

큰 그림을 놓치거나 돌파구를 찾지 못해 정체되어 표류할 때,

이럴 때 서로 격려하며 방향성과 아이디어를 함께 고민해나갈 메이트가 옆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혼자 글을 쓰며 치 떨리게 힘들고 외로운 시간을 경험한 작가들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로망일 것이다.

그래서 드라마 작업을 할 때 보조 작가를 두거나 공동 집필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많은 작가들이 이런 작업 형식에 거부감을 느낀다.

아마도 공동 작업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거나 주위에서 들은 경험담 때문일 것이다.

하물며 형제자매나 부부도 함께 붙어 작업을 하다 보면 싸우고 의가 상하기 일쑤라는데, 생판 남이 만나면, 게다가 자기 글에 대한 나름의 고집과 자부심으로 무장한 작가들이 만나면 틀림없이 서로 원수지간이 되기 십상.

그러니 행복한 공동 작업이란 꿈에만 존재하는 유토피아와 같다는 것이다.

실제로 공동 작업을 하다 서로 등 돌리고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되기도 한다.

상대방이 자기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거나, 작업에 소홀하다고 느껴진다거나,

그래서 나만 손해라는 생각이 든다거나,

혹은 서로 너무 자기주장이 강해 타협이 힘들다거나,

그러면 점차 감정의 골이 생기고 결국 팀이 와해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공동 작업으로 멋진 작품을 줄줄이 선보이고 있는 작가들이 있는 걸 보면

그건 어디까지나 상황과 경우에 따라 다르고 각자 작업하기 나름일 것이다.

그러나 안 좋은 선례들을 많이 얻어들은 나에게는 피할 수 있다면 되도록 피하고 싶은 것이 바로 공동 작업이었다.

그런데 늘 그렇듯 세상을 내 뜻대로만 살아갈 순 없다.


어느 날 한 감독님의 연락을 받고 급하게 2부작 대본 작업에 투입된 적이 있다.

이미 두 명의 작가가 쓰고 있는 상태였다.

촬영까지 불과 몇 주 안 남은 상황. 그래서 합숙을 했다.

솔직히 부담이 컸다. 긴장도 됐다. 감독님이 나에게 기대한 부분이 있을 테니,

어떻게든 그 부분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장 신경이 쓰였던 건, 다름 아닌 작가들이었다.

당연히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내심 각오를 다졌다.

어떠한 경우라도 멘털을 단단히 챙기자고. 대본 하나만 생각하자고.


구성부터 다시 손보면서 회의를 하고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근데 생각했던 것보다 감독님의 요구는 감당하기 버거웠다.

시간은 얼마 없는데 그에 비해 너무 많은 걸 수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름 수정한다고 했는데 매번 똑같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때마다 명이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완전히 갈아엎고 새판을 깔고 새로 쓰라는 요구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집에는 당연히 못 갔고 잠도 거의 못 잤다. 좀비처럼 노트북만 붙들고 있었다.

지금 떠올려도 눈물겹다 못해 처절했다.

나도 모르게 기절하듯 쓰러져 잠든 적이 여러 번.

이러다 죽겠구나, 이렇게 일하는 게 맞는 건가?  원래 이 일이 이런 건가?

수도 없이 이 길을 의심했다.


그때 느낀 것이 있다.

진정한 전우애라는 게 이런 거구나..

그때 함께 작업했던 작가들은 내 염려와는 다르게 나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여줬다.

소위 말하는 텃세나 미묘한 기싸움, 그런 게 없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었음에도 전혀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하긴 그럴 여유가 전혀 없었다.

여차하면 천 길 벼랑 끝으로 떨어질 운명의 공동체이자 유일한 비빌 언덕이었으니까.

혼자가 아닌 우리의 힘은 절박한 상황에서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하는 법이다.


모두 한 마음이 되어 대본 하나만 생각한 끝에 마침내 완대본이 나왔다.

아무리 힘들고 척박한 상황에서도 대본은 나온다는 걸 알았다.

정신 줄만 놓지 않으면 못해낼 건 없었다.

뿌듯했고, 후련했고, 기특했고, 눈물겹게 행복했다.

이런 기분에 작가는 글을 쓰며 그 힘든 과정을 견뎌내는 거구나.

평생 잊을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결국 공동작업은 톱니바퀴처럼 철저히 하나가 되어 맞물려 돌아가야만 비로소 가능한 작업이었다.

네 거 내 거 따지고 각자의 다른 이해 문제로 부딪히면 답이 없다.

신뢰와 연대를 동아줄 삼아 우리는 전사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리고 나는 공동 작업에 대한 기존의 선입견을 완전히 깰 수 있었다.

너그럽고 따뜻했던,

그릇이 큰 대인배였던,

그때 만난 작가들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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