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망생 시절을 버티는 법에 대하여
낡고 먼지 쌓인 시간들을 거슬러 올라가면
끝내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속에 끝까지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는 작디작은 불씨 하나.
길고 긴, 내 진짜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제일 먼저 거기부터 가야 한다.
대학교 시절, 나는 여러 가지 알바를 했다.
카페 알바부터 카드사 전화 알바, 포장 알바, 시험지 첨삭 알바까지.
대부분 단기였고 시급은 낮았지만
돈을 벌어보기 전과 후의 세상은 미묘하게 달랐다.
내가 나를 책임질 수 있다는 감각.
그건 생각보다 크고 묵직했다.
비로소 어른이 된 것 같았다.
비상금은 단순한 돈이 아니었다.
무언가에 도전할 용기와 선택할 자유를 주었다.
몸은 고됐지만 신선한 활력이 좋았다.
그땐 그렇게 믿었다.
알바는 학생 때나 하는 거라고.
그러니 어떻게든 학생일 때 알바의 세계를 경험해야 한다고.
그때의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직업을 가지게 된 후에도
내가 여전히 알바를 전전하게 될 거라고는..
문제는 바로 '작가'라는 직업 때문이었다.
프리랜서. 일이 없으면 수입도 없다.
그러니 알바라도 찾아 생활비를 버는 수밖에 없다.
나 또한 일이 없을 때,
그러니까 드라마를 쓰겠다고 다짐하고,
예능작가에 과감히 마침표를 찍고,
본격적으로 드라마 작가를 꿈꾸던 시절,
열심히 부업을 찾아 기웃거렸다.
그 와중에도 나름의 원칙은 있었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야. 그러니 어떤 일이든 글로 돈을 벌어야 해.
마침 운이 좋게도 어느 구인란에 올라온 글 쓰는 알바를 찾았다.
어느 기업체에서 직원들을 상대로 하는 교육용 만화 시나리오를 제작하는데
그 원고를 써줄 작가를 찾고 있었다.
드라마를 습작 중이던 내게는 그야말로 찰떡같은 일이었다.
작업시간이 길지 않은 데 비해 원고료는 꽤 높았다.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이면 하나의 프로젝트가 마무리됐고,
무엇보다 재택근무가 가능했다.
드라마를 준비하면서도 충분히 병행할 수 있었고,
글을 써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은
내 안의 작가 자존감을 지켜주는 단단한 버팀목이 되었다.
지망생 시절을 버티는 법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가장 필요한 걸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말할 것이다.
단연코 머니, 곧 알바라고.
꿈으로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대부분 단거리가 아니라 마라톤이다.
최소한의 생활비는 벌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부모님 찬스를 쓰는 것도 방법이다.
그러나 대학까지 졸업하고 집에 손을 벌리는 건,
왠지 나의 꿈에 대한 모욕이라고, 그때의 난 생각했다.
어쩌면 자격지심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감정을 무시할 순 없었다.
모든 감정은 내가 만든 거니까. 그저 감내하는 수밖에.
나는 작가 외의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건 단지 고집이 아니라
글을 쓸 때 비로소 내 삶이 살아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 시작에 대해..
드라마를 쓰기로, 아니, 그보다 먼저,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그 시작은 어디였을까?
가만히 떠올려 보면, 아무래도 그건 라디오였다.
학창 시절 나는 매일 밤 라디오를 들었다.
그건 하루를 마무리하는 나만의 의식과도 같았다.
그 유명한 시그널 음악이 터져 나오고,
디제이의 정감 어린 오프닝 멘트가 흘러나오면
나는 어느새 현실과는 다른 차원으로 빨려 들어갔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절,
그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위로였고 휴식이었고, 때로는 구원이기도 했다.
라디오를 들으며 나만의 감성과 철학을 쌓아갔다.
그때의 난 모르고 있었다.
라디오 디제이의 그 오프닝 멘트가 작가들이 써준 대본이라는 사실을.
디제이가 직접 하는 말이라고 여겼고,
그래서 더욱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고, 공감했고, 경탄했고, 애정했다.
그랬는데, 그것이 작가의 대본이었다니!
당시 나에게는 꽤나 큰 충격이었다.
솔직히, 조금은 배신감도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전에 없던 감정이 마음에 들어섰다.
‘동경’
나도 그렇게 글로 누군가를 웃기고 울리며 들었다 놨다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작가라는 꿈을 내 안에 품었다.
그건 절대 사라지지 않을 만큼 아주 강력한 불씨였다.
그리고 그것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알 수 없다.
시작이라는 건,
무언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갖는다는 건,
불씨 하나를 가슴에 품는 일이다.
그건 절대 쉽게 꺼지는 법이 없다.
그 불씨는 결국 불꽃이 되어 우리를 앞으로 이끈다.
나는 그 불꽃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뜨거웠고.. 찬란했던.. 그 시절의 나에게,
나의 시작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지금도 나는 묵묵히,
그리고 간절히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