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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몽수 Nov 19. 2019

작가는 동사다


원고료가 나왔다. 생애 첫 단막극이 방송되고 팽팽하게 부풀었던 마음이 조금은 말랑해질 무렵이었다.

액수는 정확히 기억 안 나지만 일반 회사원의 한 달 급여 정도였다.

감격스러웠다. 내가 쓴 대본을 돈과 맞바꾸다니!

드라마를 써서 처음으로 번 돈. 나에겐 이미 계획이 있었다.

곧장 가서 나의 첫 노트북을 샀다. 최고로 비싸고 최고로 예쁘고 최고로 가벼운 걸로.

글이 술술 잘 써질 것 같은 최신형 노트북이 내 품 안에 들어왔다.


노트북을 가방에 고이 넣어 자주 가던 집 근처 도서관에 갔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히 내가 늘 다니던 길이었는데.. 그 길이 맞는데.. 내 눈에 보인 건 이전의 그 길이 아니었다. 놀라울 만큼 낯설었다.

길가에 핀 형형색색 꽃들이 보였고, 높고 푸른 하늘이 보였고, 오고 가는 사람들의 면면이 보였다.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눈부시게 내렸고, 거리를 둘러싼 갖가지 소음들이 자연스럽게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전에는 미처 몰랐던 평범하고 일상적인 풍경들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듯 각자의 생명력을 한껏 뽐내며.

대체 예전에 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며 살았던 걸까?


그제야 떠올랐다.

드라마를 쓰면서 모든 관계를 차단하고 고립됐던 지난 시간들이.

날로 커지는 열등감과 자기 연민으로 가장 가까운 것도 제대로 눈에 담지 못했던 날들이.

그런데 단막극을 하나 방송하고 나자 달라졌다.

세상이 환히 보였다.

뭔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은 자신감과 활력이 되어 나의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마침내 꿈에 그리던 드라마 작가가 되었고,

신상 노트북에 신상 글을 가득 채울 생각에 한껏 들떴다.

그것이 안개처럼 잠시 보이다 허무하게 사라지는 건 줄 미처 알지 못했다.      


나의 삶은 방송 전과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너무 똑같아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전처럼 교육원에 나가 수업을 들었고,

글이 안 써질 때면 우울과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고,

공모전에 낸 대본은 똑 떨어졌으며 심지어 교육원 창작반에도 올라가지 못했다.

방송 하나 했을 뿐, 나를 드라마 작가로 인정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보다 더 불안했고 초조했다.

그리고, 서러웠다.

힘들게 한고비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그 앞에 더 높고 거대한 장벽이 떡 버티고 서있는 느낌.

막막했다. 꿈과의 사투에 더 이상 뜨거운 열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내 안은 폐허였고, 더 이상 글은 써지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무얼 위해 달려온 걸까? 대체 무얼 꿈꿀 걸까? 또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던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내가 꿈꾼 건 글 쓰는 사람이 아니라 작가라는 폼나는 타이틀이었다는 걸.

작가적 소양 없이 고작 단막극 하나 방송하고 그 이름에 흠뻑 도취돼있었다는 걸.

쓴다는 것, 써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면 이미 작가가 아니다.

작가라서 쓰는 것이 아니라 쓰는 사람이 작가라는 걸,

작가는 명사지만 '쓰다'라는 의미의 동사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재확인했다.


그리고 자문했다.

왜 드라마를 쓰는가? 왜 계속 써야 하는가? 세상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가?

내 안에서 메시지를 찾고자 노력했다.

애써 꾸미려 하지 않고 힘을 뺀 문장들을 하나씩 써 내려갔다.

잘 쓰려하기보다 매일매일 쓴다는 것에 집중했다.

글쓰기에도 근육이 붙는다는 걸 체감하고 싶었지만 그건 말처럼 쉽지 않았다.

여전히 글쓰기는 혼자만의 외로운 싸움이었고 끈기와 인내, 지구력이 필요한 힘겨운 노동이었다.

그러다 나는 다음의 문장과 만났다.


[글쓰기란 참으로 근사한 일이다. 글을 쓰면서 우리는 더 이상 자신에게 머물 필요가 없고,

자신이 창조한 우주에서 움직일 수 있으니 말이다.

예를 들어 오늘 나는 남자가 되었다가 여자가 되기도 하며,

가을날 오후에 노란 낙엽을 밟고 말을 타고 숲을 지나가기도 한다.
나는 또 멋지고 근사한 말에, 잎사귀에, 바람에, 주인공이 하는 말속에 존재할 수도 있고,
심지어 사랑에 빠진 주인공의 눈을 감게 만드는 불타는 태양 안에 존재할 수도 있다. -플로베르]


눈이 번쩍 떠졌다.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다.

창작의 재미를 정확하게 짚어낸 이 문장을 만나자 한동안 잃어버렸던 창작욕이 다시금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글쓰기는 여전히 근사한 일, 변하지 않았다. 단지 내가 변했을 뿐.

초심으로 돌아가 계속 글을 썼다. 전보다 조금 덜 외롭고, 조금 덜 초조했다.


열심히 쓴 대본을 추려 총 세 편의 단막극 대본을 지난번 함께 일했던 감독님께 보냈다.

긴장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다행히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이후 그 대본들은 차례로 다 방송이 되어 세상에 나왔다.


그때 알았다.

꿈은 우리에게 길을 밝혀주는 등대이며 이정표이지 싸워서 이겨 넘겨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걸.

나는 길을 잃은 게 아니라 다만 새로운 길을 만난 것뿐이었다.

작가가 매일매일 글을 쓰는 사람이듯 인간은 매일매일 살아가는 사람이다.

사람답게 늘 반짝이는 꿈을 꾸며 하루만큼 성장하면서.

작가가 동사이듯 인간 역시 동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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