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굶찮니 Dec 24. 2023

[일본 돗토리 5편] 여긴 왜 왔음?

쉬러 왔다니깐요.......

모름지기 여행을 할 때는 부족한듯 조금씩 여러 가지를 먹어야 한다. 특히나 일본은 기본적으로 소박하게 나오는 편이니까 이 소박한 양의 룰을 잘 따르면 여러 가게를 도는 것이 비교적 자유롭다. 


하지만 이 망할 놈의 내 위장은 그딴 신호를 대뇌의 전두엽까지 고스란히 전달하지 못한 채 본인이 위급한 상황만 과장하여 전달한다. 고라니 한 마리 나타났을 뿐인데 북한군이 쳐들어왔다고 데프콘 2를 걸어버리는 미친 상황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그래서 나는 우동 가게에서 절제를 하지 못하고, 그런 와중에 맥주는 먹고 싶고, 그냥 간단하게 먹을 가게를 찾던 와중에 딱 원하는 가게를 발견했다. 딱히 요리를 시키지 않아도 되고, 주인장이랑 간단한 노가리도 깔 수 있는 진짜 동네 술집.


간단한 안주와 맥주. 내가 그날 저녁에 정말 원했던 조합이었다. [출처: 지가 먹을 것도 아닌데 눈돌아간 iphone XS]


역시나 이곳도 나 이외에 한팀밖에 없었고 그나마 내가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 일행도 계산하고 나갔다. 손님은 나뿐이었다. 이곳 사장님과 종업원은 맥주를 내어주고 나서 자기들끼리 그릇이나 새로 산 조명 등에 대한 자질구레한 대화를 하다가 어딘가 요상하게 생긴 나에게 관심을 보였다. 




사장님: 혼자 왔어요?

나:       (맥주를 들이키며) 넹.

사장님: 어디.... 도시에서 왔어요? (도쿄를 말하는 것 같았다.)

나:       아니요. 외국이요.

사장님: 아~ 대만?

나:       한국이요.

사장님: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여기는 왜 왔어요?

나:       (그딴걸 왜 물어보냐는 듯이) 그냥 쉬러요.

사장님: 혼자서? 대단하네~ 여긴 볼 게 없는데. 그쵸?

종업원: 그러게요. 여기 뭐 볼 게 있나? 호호호.




이 한적한 곳에 뭐하러 왔냐며 나를 되게 신기하게 바라보며 대화가 시작되었다. 와서 며칠 지내보니 알게 되었지만 여기는 정말 시골인 것 같았다. 보통 자연스러운 대화라면 이렇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혼자 왔어요? 어느 나라?"

"한국이요."

"한국 좋은 곳이죠. 저도 가 본적이 있어요. 여기는 관광하러?"

"그렇죠. 쉬러 왔어요."

"그럼, 여기는 가 봤어요? 나중에 한번 가 보세요. 좋은 곳이에요."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대화가 참 묘하게 흘러갔다. 




종업원: (휴대폰으로 검색하며) 여기 뭐 볼 게 있나....?

사장님: 사구는 가 봤죠? 

나:       네, 오늘....

종업원: (핑크핑크 기차역 恋山形 사진을 보며) 여기 가 봤어요?

사장님: 여기가 어디야?

종업원: 여기 꽤 핫해요. 옛날에 남친이랑 다녀왔는데.

사장님: 어디있는데요? 에이 멀잖아. 못 갈걸?

나:       일단 혼자라서 가기 좀 그러네요.

종업원: 그래도 유명한데, 호호홓 다른 데는 뭐 볼 게 없는데.

나:       사장님은 해외여행 가 보신 곳 있으세요?

사장님: 한 번도 안 나가봤어요. 

나:       왜요?

사장님: 야구랑 축구보느라요. 아하하하.




뭔가 정신이 나갈 것같은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주구장창 K-POP이 나오는 바 Sunny side bar サニバル. 정작 사장님은 K-POP 문외한임. [출처: 피곤한 iphone XS]


나:       아까부터 K-POP이 계속 나오던데 좋아하세요?

사장님: 잘 몰라요.

종업원: 사장님, 저 가요~

사장님: 수고했어요. 거 뭐냐, 옛날에 알바하던 애가 빠순이었는데 걔가 계속 틀어 놓길래 틀어 놨어요.

나:       아, 지금은 일 안하고요. 

사장님: 그렇죠. 뭐 그리고 요즘 나오는 일본 노래가 계속 우울한 거만 나와서 밝은 거 틀어놓으려고요.

나:       아, 신나기는 하죠.

사장님: 그쵸? ㅋㅋㅋㅋㅋㅋ

나:       ㅋㅋㅋㅋㅋㅋㅋ....


 

뭐 그런가 보다 했다. 나도 K-POP이나 J-POP을 빠삭하게 아는 것은 아니니. 그 이후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맥주 배를 왕창 채우고 숙소로 돌아왔다. 뭔가 가식적이지 않고 솔직한 이야기가 오고 간 대화에서 아, 찐 로컬이 이런 분위기인가 싶었다. 분명 나도 우리 동네에 오는 외국인들에게는 그런 얘길 자주 하곤 한다. 여기 사실 알고 보면 볼 거 없는데....... 왜 오나 싶어요. 하고 말이다. 


숙소로 돌아왔다. 주인장 아저씨가 술먹고 왔냐고 해서 그렇다고 하자, 내 손에 들린 맥주 두 캔을 보고 '호오~' 하면서 뭔가 잔뜩 오해한 얼굴로 방으로 들어갔다. 아니에요. 마실 거긴 한데, 아니라니깐. 


페밀리마트에서 산 맥주. 그래도 이런 걸 보고 어떻게 참음? ㅋㅋㅋ? [출처: 내가 인간이었으면 한잔 들이켰다고 주장하는 iphone XS]


그리고 아침이 되었다. 사실 저녁을 먹기 전에 들른 동네 목욕탕(온천) 또 가고 싶어서 아침 일찍 일어나 다녀오기로 했다. 기왕 여행 온 거 온천은 최대한 많이 들락거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동네 목욕탕 느낌의 온천 日乃丸温泉. 그야말로 동네 오래된 목욕탕이다. [출처: 아침이라 상쾌한 iphone XS]


커튼을 들추고 들어가면 남탕 여탕 가운데에 할머니가 앉아있는 장소가 있고, 허름하고 좁은 목욕탕이 있다. 여기에서 모든 용품은 입구에 서 있는 자판기에서 계산을 한 다음 할머니께 종이를 드려야 한다. 한자가 약한 내가 머뭇거리자 할머니가 위에! 밑에! 오른쪽! 이렇게 내비게이션을 해주었다. 


역 근처에 있는 작은 찻집 珈琲園. 노부부가 운영하고 있다. [출처: 노곤노곤한 iphone XS]


게스트 하우스 주인 아저씨가 추천해 주신 조식 장소 중에서 가장 끌리는 곳에 가 보기로 했다. 이곳 珈琲園은 특출나게 맛있지는 않지만 분위기가 옛스런 분위기여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푸짐하게, 맛있게 먹고 싶다면 다른 곳을 가는 것이 좋겠다. 첫날 내가 머물렀던 호텔의 1층 식당은 외부인도 돈을 내면 조식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한번 더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드디어 그지부터 왕까지 콘셉트 여행의 '왕'을 담당하는 값비싼 료칸에 입성하게 된다. 예약할 때 손가락이 살짝 떨렸던 것은, 그냥 지구가 흔들린 것이다. 그렇다. 아.......


계속.





작가의 이전글 [일본 돗토리 4편] 사람이 없는 기묘한 거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