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빨강머리 앤을 찾아서> 전시회

- 강릉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3부)

by 중현

서점에서 일하면서 매주마다 전국의 작가들로부터 도서 입고 문의를 받는다. 예전만 해도 작가 하면 신문사에서 주관한 신춘문예 수상자이거나 한 분야에서 널리 이름을 날린 전문가한테만 해당하는 줄 알았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수많은 문학 작가가 신춘문예 같은 글쓰기 대회를 통해 등단했고, 업계 전문가가 책을 저술하는 일은 예전과 변함없으니 말이다. 과거보다 영향력은 줄어들었을지언정 기존의 출판 기조는 여전히 강성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출판 시장의 흐름이 다양해졌다. 독자의 관심 분야가 세분화되고 독서 스타일도 변화함에 따라 그에 맞게 글을 쓰거나 출판하는 회사가 많아진 것이다. 국문학을 전공하지 않아도 이렇다 내세울 경력이 없어도 자신이 쓴 글로 출판사와 계약해 출판하는 세상으로 변했다. 게다가 예전처럼 출판사에 원고를 제출하는 방식 말고도 1인 출판사라든지, 뉴스레터 구독을 활용해 독자와 직거래 같은 방식으로도 자기 이야기를 상대방에게 전달했다. 출판 작가로 가는 길이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어진 것이다. 인기 블로거, 브런치에서 많은 팬을 보유하거나, 유튜버로도 입지적인 인물이 되어도 작가가 될 수 있으며, 또 1인 출판사를 세워 독립 출판물을 낼 수도 있다. 굳이 옛날처럼 신춘문예를 통하지 않더라도, 작가라는 타이틀을 스스로에게 붙일 수 있었다.


출판에 대한 문턱이 낮아지다 보니 자기 글을 모아 책으로 내는 작가가 많아졌다. 자연스럽게 입고 문의도 늘었다. 일주일에 적어도 3~4번은 작가가 직접 책을 들고 오거나, 메일을 통해 입고 문의가 들어왔다. 언젠가부터 문의 도서를 확인하는 일이 업무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내가 일하는 서점은 종합서점을 지향하는 곳이었다. 이미 북센, 북플러스 같은 총판(도매상)으로부터 책을 들여왔기 때문에, 개별로 오는 문의는 전부 거절해도 문제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일 하나하나, 방문하신 분의 이야기를 한 마디 한 마디 귀 기울였다. 그들 대부분은 소형 출판사의 책이거나 자비를 들여 낸 독립출판물이었는데, 입고를 부탁하는 그 표정과 글에서 하나같이 간절함이 묻어났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알고 있기에 그 소리를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책을 들이든, 거절하든 거의 모든 문의에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는 책 내용을 살펴봤다. 총판을 통해 들여올 수 있는 책이면 주문하고 그렇지 않은 책은 내용을 보며 구매 여부를 결정했다. 다만 서점에서도 손해를 보면 안 되기 때문에 구매하기 전에 꼼꼼히 체크했다. 필력, 내용의 참신성, 디자인, 매장 분위기와 적합한지, 인기를 끌만한 요소가 있는지 등을 말이다. 기성 출판물들과 같거나 뒤떨어져서는 안 됐다. 기존의 책과 또 다른 특별함을 찾아야 했다. 결국 여러 이유로 인해 독립 출판물의 대다수가 우리 매대에 놓이지 못했다.


여느 때처럼 매장에서 도서를 정리할 때였다. 도서 매입을 끝내고, 무심코 메일 정리함을 확인했다. 그새 또 다른 입고 문의가 들어왔다. 할 일도 다 마쳤겠다. 이번엔 어떤 류의 책일까 싶어 제목을 클릭했다. 책 제목은 <빨강머리 앤을 찾아서>였다. '빨강머리 앤 하면 어렸을 때 만화에 나오던 주근깨 아이잖아?'라고 머릿속에서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내용을 확인해보니 캐나다 여행기였다. 작가인 몽고메리의 생가와 <빨강머리 앤>의 실제 모티브인 초록 지붕 집(그린 게이블즈)을 직접 다녀온 여행기를 글과 그림으로 엮은 책이었다. 수채화로 된 그림은 물감이 자연스럽게 번져서인지 보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집 안의 도구를 세세하게 그려냈고, 당시의 상황도 글로 풀어써 마치 그 장면을 보는 듯 실감 났다. 나는 <빨강머리 앤>을 만화로 거의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작품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았는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 책은 기획력도, 작품성도 흠잡을 데 없었다. 이 작품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듯했다. 앤의 향수를 느낄만한 작품이라 생각했다. 곧바로 대표님께 구매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대표님한테서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네, 매장에 진열해도 좋겠어요. 그리고 그림이 전부 다 예쁘니, 2층 공간에 기획 전시를 해볼까요? 중현 씨 의견은 어때요?" 예상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네? 전시라고요?"


작가님께 입고 요청을 드리는 동시에 전시회에 관해 제안했다. '매장 2층에 전시 공간이 있는데, 그곳에 작가님 그림을 액자로 진열해도 괜찮냐고.' 작가님은 예상치 못한 제안에 화들짝 놀랐는지 타자를 썼다 없앴다를 반복했다. 그것도 잠시, 잘 부탁한다는 글과 함께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됐다, 됐어.' 나도 처음 해보는 제안이라 과연 허락해 주실지 내심 조마조마한 상태였다. 다행히 작가님에게서 자유롭게 전시하라는 답변을 받았으니, 앞으로 그림을 고르는 일만 남은 셈이다.


그림을 진열하기에 앞서 <빨강머리 앤을 찾아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욱 읽었다. 전시를 제대로 하려면 내용 파악부터 하는 일은 기본. 책은 빨강머리 앤의 모티브과 된 집과 거리, 작가인 몽고메리가 살던 캐나다의 프린스 에드워드 섬을 여행하는 이야기였다. 그림이 메인이고 글은 보조 역할에 가까웠다. 수채화로 그린 그림에 맞게 글도 잔잔하면서 콩닥콩닥 설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글을 읽는 동안 작가님께서 빨강머리 앤을 향한 애정이 얼마만큼 깊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책을 덮은 다음에는 인터넷으로 관련 정보를 찾았다. 마침 넷플릭스에서 <빨강머리 앤> 드라마가 올라와 있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앤을 보며 '이 아이가 이렇게 수다스러운 데다 긍정적이고 게다가 상상력이 풍부한 친구였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오랫동안 국적을 불문하고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왔구나라며 스스로 납득하게 됐다. 빨강머리 앤에 대해 알아갈수록 그녀가 가진 매력에 푹 빠져갔다.


고민 끝에 그림 19장을 골랐다. 방문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매끄럽게 내용을 알 수 있도록 책 순서를 달리했다. 앤이 살던 초록 지붕 집을 찾아가기까지가 전반부, 작가인 몽고메리의 집과 그 주변 일대를 그린 그림이 후반부로 말이다. 아무 설명 없이 그림만 덩그러니 놓으니 밋밋해 보였다. 오른쪽 아래에 메모지를 놓고 그 안에 작가님의 글을 인쇄해 붙였다. 많은 사람이 작가님의 그림을 보며 어릴 적 TV에서 본 앤의 모습을 떠올리기를 희망했다.


전시회가 시작되고, 책방을 방문하는 사람이 2층까지 올라와 <빨강머리 앤을 찾아서> 전시회를 둘러봤다. 다들 그림을 감상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내디뎠다. 중간에 작가님 책을 들어 보는 사람도 있었다. 다 보고 <빨강머리 앤> 소설을 집어 든 손님도 계셨다. 전시한 그림을 구매하고 싶다는 연락도 받았다. 예상한 것보다 반응이 컸다. 성공이었다. 주말에는 작가님도 방문해서 매장 안을 훑어봤다. 그녀는 전시회를 한 바퀴 둘러본 다음, 자신의 작품을 이렇게 정성 들여 전시했다는 사실에 뛸 듯이 기뻐했다. 작가님께 "다른 그림으로 바꾸거나, 순서를 변경해야 한다면 말씀해 주세요."라고 묻자, "아뇨, 전혀 없어요."라고 답하며 다시 매장의 그림을 보러 가셨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놓았다. 전시회 일은 처음이라 내내 긴장감 속에 일을 진행했다. 작품을 살펴보고 그림을 선정하고 글 편집하느라 2주 내내 머리를 싸매며 고생했다. 하지만 노력한 만큼 알아봐 주신 걸가? 다들 좋아해 주셨다. 보상받은 기분이 들었다. 힘들긴 했지만 기회가 된다면 앞으로 또 해보고 싶은 마음이 피어났다. 역시 관람객이 편히 즐기기 위해서는 기획자가 그만큼 몸과 마음으로 성을 다 해야 하는가 보다. 자기가 맡은 일에 열과 성을 다하면 인정해 주는건, 만고불변의 진리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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