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새미의 첫 마라톤!
- 강릉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3부)
강릉으로 이주하고 나서 새미의 몸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고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몸과 마음이 긴장을 푼 것일까? 성남에서는 내담자의 말 한마디, 몸짓과 손짓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쏟았다.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일하는 내내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하지만 강릉에서는 마음을 졸여가며 일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더욱이 이주 첫 해 새미는 성남에서만 일하고 강릉으로 돌아와서는 아무 일 없이 편히 쉬었다.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몸이 회복된 것이다. 그리고 내가 쉬는 날에는 둘이서 바닷가며, 소나무 숲이며, 가까운 경포를 산책했다.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몸소 실천했다고나 할까?
강릉에 살게 된 지 1달이 채 안 된 어느 날 둘이서 경포까지 뛰었다. "준비~땅!" 하며 호기롭게 출발한 새미였지만, 첫 달리기라서 그런지 숨이 차 그만 1km밖에 못 뛰었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이 자극이 됐나 보다. 그 후로도 종종 함께 달리면서 거리를 늘려갔다. 2km, 3km 뛰더니 이듬해 경포호수 한 바퀴를 걷지 않고 완주했다. 참고로 경포호수 한 바퀴는 약 4.3km이다. 단순 계산이지만 이주 초기에 비해 폐활량이 4배나 좋아진 것이다. 옆에서 건강해지는 모습을 보며 뿌듯했다. 강릉으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러닝을 시작한 후로 친구도 새로 사귀었다. 마침 강릉에 러너들을 모집하는 '하슬라 러닝 크루'가 생겼는데, 처음에 내가 먼저 활동하면서 크루원들의 면면을 확인했다. 1km를 5분 전후로 달리는 러너도 있었고, 7분 전후반 대인 초보 러너도 몇몇 보였다. 이 정도면 새미도 뛸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새미에게도 같이 뛰자고 권했다. 처음 해보는 크루 활동에 초반은 머뭇머뭇거렸지만, 시간이 지나자 오히려 나보다 더 자주 러닝 모임에 나갔다. 아무래도 크루를 총괄하는 운영장이 초보 러너, 특히 여성들이 마음 편히 뛰도록 환경을 조성했기 때문이리라. 거기다 새미는 본래 지닌 특유의 친화력을 십분 활용해 크루 멤버들과 금세 친해졌다. 여성 크루원들과 개인적으로 만나 밥도 먹고 술도 마시러 갔다. 크루 활동을 먼저 한건 나였는데, 정작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새미였다. 옆에서 보던 내가 질투 섞인 말을 던졌다. '칫 부러워라.'
날이 갈수록 새미의 폐활량은 좋아졌다. 주로 혼자 일하고, 달리기도 개인적으로 따로 하는 나와 달리, 새미는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는 걸 선호했다. 크루원 중에 같은 연령대, 엇비슷한 러닝 페이스를 지닌 사람들과 뛰다 보니 나날이 실력이 좋아졌다. 러닝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다리에 근육이 붙었다. 거리도 늘어났다. 한 번에 5km를 넘어 8킬로까지도 뛸 정도였다. 새미가 욕심내서 거리를 늘린 이유가 있는데, 다름 아니라 11월에 열릴 대회 때문이었다. 바로 JTBC 마라톤이었다.
11월 초 하슬라 러닝 크루에서 자체적으로 코스를 짜서 10km 대회를 추진하기로 했다. 원래 대회는 JTBC 마라톤 10km이었으나 코로나가 급격히 확산하면서 언택트 마라톤으로 바뀌었다. 코로나의 여파로 봄부터 크고 작은 마라톤 대회가 줄줄이 취소됐다. 대회를 보고 달려온 전국의 프로/아마추어 마라토너들은 허탈해했다. 각 대회 주최 측은 그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각자의 장소에서 달리는 '언택트런'을 마련했다. 러너들이 언택트런을 통해 대회의 갈증을 조금이나마 풀길 희망하는 마음이었다.
아침 8시 반 안목 해변으로 러닝 크루 사람들이 속속들이 모였다. 나는 바람막이 위에 트레일 러닝용 가방을 입었다. 그곳에 에너지 젤과, 마실 음료와 물을 가득 채워서 갔다. 오늘 나는 새미의 페이스 메이커이자 달리는 급수대 역할을 할 예정이었다. 사람들이 내 모습을 보며 조금 신기해했다. '안녕하세요. 새미 전용 페이스메이커이자 급수대 이중현입니다.'
9시 정각이 되면서 장소를 널찍한 곳으로 옮겨 몸을 풀었다. 원으로 둥글게 자리를 잡고 각자 몸을 풀었다. 멤버 중 절반 이상은 마라톤 대회가 처음이었다. 살면서 10km라는 긴 거리를 뛸 기회는 많지 않았다. 혼자서 뛰기에는 힘든 거리이다. 그러니 이번처럼 다 같이 모여 뛸 때를 기회삼아 뛰어보는 것이지. 몸을 다 풀고 안목해변 끝자락에 출발대에 섰다. 오늘의 코스는 안목에서 시작해 남대천 길을 따라 남대천 새벽 시장 가까이까지 간 후 다시 돌아오는 코스이다. 원으로 둘러 서서 단체로 몸을 푼 다음, 단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2열로 줄을 서서 스타트 라인에 섰다.
"자~!! 모두들 파이팅!!" 크루장의 외침에 따라 일제히 출발했다. 페이스가 빠른 사람들이 앞줄로 튀어나갔다. 우리는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천천히 뛸 예정이라 처음부터 가장 뒷줄에 서 있었다. 사람 사이의 정체가 끝나고 간격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하나 둘 하나 둘' 이제 진짜 마라톤이다.
안목해변 뒷길을 돌고 남대천에 접어들자 매서운 바람이 몰아닥쳤다. 대관령을 타고 온 바람이 남대천까지 온 것인데, 강가에 있다 보니 앞에 가림막이 하나도 없었다. 온몸으로 바람과 맞섰다. 바닷가와 인접한 강가라서 그런 걸까? 바람의 세기가 유독 강하게 느껴졌다. 강 건너편에는 대포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강가에서 쉬는 새를 촬영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이곳이 탐조지로 유명한 곳이라 한다. '경포호수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새들이 좋아하는 곳이 따로 있었구나.' 다시 고개를 돌려 새미와 페이스를 맞췄다.
맞바람이 심해 페이스를 늦췄다. 레이스는 길다. 바람과 맞서려다 무리해서 오버페이스 하면 후반에는 터덜터덜 걸어와야 할지도 모른다. 새미의 안색을 살폈다. 아직까지 괜찮아 보였다. 속도는 7분 초반대이고, 호흡은 정상적이며, 디딤발의 템포 또한 평소와 같았다. 옆에서 발을 맞춰 가며 페이스를 조절했다. 대회 중반에 가까워질 무렵 운영진이 설치한 급수대가 보였다. 급수대는 4km 지점에 설치돼 있었다. 지금 저게 보인다는 것은 반환점이 얼마 안 남았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새미에게 급수 여부를 묻자 아직 때가 아닌지 고개를 저었다. 운영진과 반갑게 손뼉을 마주치며 스쳐 지나갔다. 슬슬 반환점을 돌고 돌아오는 크루원들과 만났다. "파이팅!" "파이팅!" 짧게 나눈 한 마디였지만, 러너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필요한 응원이었다. 사람들과 손뼉을 마주치다 보니 어느새 반환점까지 다다랐다. 이제 절반만 더 가면 완주다!!
그런데 한참 열심히 뛰던 새미가 반환점을 돈 지 얼마 안 돼 돌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내 가슴팍에 있는 물을 달라며 호소했다. '아이고, 맞바람에 평소보다 에너지를 빨리 썼구나.' 뚜껑을 열어 새미에게 걷넸다. 그리고 에너지 젤로 뜯어 한사코 거부하는 새미를 어르고 달래 먹였다. 그사이 앞에서 미선이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미선이도 급수대를 지나친 후 목이 말랐는지 몹시 힘들어했다. 물과 음료를 양손에 쥐고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줬다. 둘 다 목을 축인 다음에, 다시 자세를 갖추고 앞으로 뛰어나갔다. '둘 다 힘내!'
반환점을 돌면서 맞바람이 순풍으로 바뀌었다. 새미의 페이스도 조금씩 올라갔다. 처음에 7분 초반대로 달렸는데, 중반을 넘어가자 6분 30초까지 단축했다. 몸이 풀린 걸까, 오버 페이스인 걸까. 앞만 보며 뛰는 새미를 향해 말을 걸었다. "지금 좀 빠른 페이스야. 몸상태 괜찮아?" 새미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이대로 가자. 그 후로 페이스는 조금 느려졌지만 계속해서 6분 중후반대를 유지했다. 앞으로 남은 거리는 1km. 조금만 더 가면 안목 뒷길이다. 잘하면 평균 6분대 페이스도 가능해 보였다. 남대천에서 안목으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을 오른 다음 남은 길 동안 질주했다. 페이스가 다시 6분 30초대로 올라갔다. "하아 하아 하아." 새미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새미보다 반 발짝 앞서서 리드했다. 이대로 완주하길.
안목 뒷길을 돌아 오르자 안목 주차장이 보였다. 그곳에 10km를 완주한 크루원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 곳에서부터 속을 흔들며 목청껏 응원하고 있었다. "다 왔다 다 왔어!!" "조금만 더 힘내!!" "파이팅 파이팅 파이팅!!" 열댓 명의 크루원이 한 목소리로 응원했다. 새미가 고개를 숙이고 억지로 팔을 휘두르며 마지막 안간힘을 썼다. "하아 하아 하아" 200m, 100m, 50m 그리고 완주!! 크루원들이 손뼉을 치며 환영했다. 새미는 허벅지에 팔을 기댄 채로 거친 숨을 내쉬었다. 운동 시간 1시간 12분 14초, 평균 속도 7분 3초/1km를 기록했다. 신기록이었다. 곧이어 마지막 러너인 미선이도 완주하면서 크루원 전원이 무사히 완주했다. 처음 뛰어보는 장거리에, 맞바람 그리고 산책길을 오가는 자전거와 사람들을 피해 가며 뛴 대회였다. 예상보다 더 힘든 코스였지만 다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완주했다. 비록 온 에너지를 다 썼지만, 오늘 일을 계기로 한 꺼풀 성장하지 되지 않았을까? 새미가 여성 크루원들이랑 포즈를 취해가며 사진을 찍고 있다. '이~얍 이~얍' 특유의 파워레인저 같은 자세다. 처음에 달리기 마니아인 나를 따라 억지로 뛰는 건 아닐지 걱정했다. 하지만 환하게 웃는 저 미소를 보면서 조금은 안심했다. 다행이다. 새미가 스스로 원하는 방향으로 생활하는 것 같아서, 그리고 무엇보다 건강해서 말이다. 새미의 웃는 모습을 앞으로도 줄곧 지키고 싶은 마음이 든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