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릉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3부)
많은 운동선수와 연예인이 경기 또는 공연에 앞서 자기만의 의식을 치르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결승 라운드에서 항상 같은 복장을 입는다든지, 자유투 하기 전에 공을 5번 지면에 튕기고 던진다든지, 노래 제목을 세 글자로 정한다든지 말이다. 소위 징크스라 부르는 행위이다. 과학적으로는 입증되지 않았으나, 좋은 결과를 바라는 마음에 유명인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자기만의 징크스를 갖고 이를 실행한다. 내게도 그와 같은 행동이 존재한다. 바로 무릎 통증을 느끼거나 발목을 삘 때면 등산을 다녀오면서 회복하는 방법이다. '다리를 다쳤는데 낫기 위해 등산하러 간다고?!' 아마 주위에서 미쳤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몇 번의 과정을 반복하며 새겨진 나름의 확신이 있었다.
달리기를 시작한 지 채 1년이 안 됐을 무렵의 일이다. 토요일에 10km 대회를 완주하고 일요일에 축구 시합이 잡혀 있었다. 다음날 다리의 쌓인 피로를 미처 풀 새도 없이 친구들과 공을 찼다. 2~3시간 축구를 하는 내내 그라운드 곳곳을 뛰어다녔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한계치를 넘었던 걸까, 거의 끝나갈 즈음 무릎에 심한 저림 현상이 찾아왔다. 뛰는 것은 물론이고 걸을 때조차 통증이 동반됐다. 막판에는 절뚝이며 벤치로 걸어올 정도였다. 무릎 통증은 시합이 끝난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운동을 쉬고 집에서 가만히 지내야 했다.
부상을 입은 지 반년이 지난 어느 날 시험 삼아 등산을 다녀왔다. 이제 일상생활은 크게 문제없었다. 다만 달리기만 하면 무릎에 통증이 느껴졌다. 10~20분 뛰었을 뿐인데도 저림 반응이 왔다. 그래서 등산하기에 앞서 끈을 꽉 조여 '걷는 건 괜찮으니까 산을 오르며 몸상태를 확인해보자.'라며 혼자 생각했더랬다. 실제로 산을 오르자 예상보다 무릎의 통증이 적었다. 하산할 때도 괜찮았다. 등산할 때 몸에서 받는 하중이 달리기보다 훨씬 덜하기 때문인 걸까? 3~4시간 산을 걸으면서 하체가 튼실해지고 무릎도 딴딴해진 느낌이 들었다. 얼마 후 다시 달리기를 시작하자 이전보다 저림 현상이 많이 나아졌다. 30~40분 뛰어도 큰 불편이 없었다. 그때부터 부상 후 등산은 내게 징크스 같은 행위가 되었다.
9월 초 어두운 밤에 경포호수 근처를 뛰다가 그만 오른발을 크게 접질렀다. 아직 야간 등이 안 켜진 시간대에 뛰다가 그만 움푹 파인 맨홀에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넘어진 직후에는 걸음걸이도 제대로 하기 힘들었다. 자전거로 따라오던 새미가 다리를 부여잡은 나를 보며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했다. 다행히 염좌나 골절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오른발이 크게 부어 올라 있었다. 치료를 위해 포남동의 청운한의원에서 침을 맞았다. 한의원을 다니면서 몸상태는 차츰 나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단을 오르내리는데 찡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부상이 길어질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한동안 운동을 쉬었다.
한 달 후, 새미 옆에서 페이스메이커로 10km를 뛰면서 다리 상태를 확인했다. 많이 좋아졌다. 이 정도면 다음 코스를 밟아도 될 것 같았다. 다리에 근육을 붙여줘야지. 등산이다. 그러고 보니 강릉에 온 이후 대관령의 산자락을 바라만 봤지 아직 오른 적이 없었다. 그래 이 기회에 가볼까. 새미에게 다가가 살살 꼬드겼다.
“여보야, 오랜만에 등산 한 번 갈까? 요 앞에 선자령이란 산이 있는데, 경사가 완만하고 2~3km 정도밖에 안 된다 하더라고.”
“좋아~ 오랜만에 여봉이가 사 준 등산화 신겠네~!”
대관령 휴게소에는 먹을거리와 양떼목장을 가기 위한 사람들로 북적였다. 우리는 무리를 헤치고 등산 초입길까지 올라갔다. 대관령 휴게소에 주차한 후 등산로 입구까지 걸어가는데 족히 20분 이상을 걸었다. '입구가 좀 머네?' 생각할 즈음. 저 앞에서 등산로 입구가 보였다. 그런데 바로 옆에 주차장이 마련돼 있는 게 아닌가?! '이럴 줄 알았으면 여기까지 운전해 올걸.' 등산로 입구에는 선자령까지 가는 안내판이 보였다. 왼쪽도 오른쪽도 둘 다 선자령을 가리키는 코스였다. 왼쪽은 평평한 대신 4.6km로 길고, 오른쪽은 초반부터 가파른 대신 3.6km로 짧았다. 우리는 조금 길더라도 평탄한 길로 가기로 정했다. '그런데 잠깐만? 내가 처음에 2~3km라고 말하고 데려왔는데?' 말없이 조용히 선두에 서서 걸어갔다.
단풍이 저문 산길은 고요했다. 아니 조용하다 못해 쓸쓸해 보였다. 적막한 산속에서 시냇물만이 졸졸졸 아래로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낙엽이 다 떨어진 늦가을의 등산이란 이처럼 겨울 냄새를 풍기나 보다. '바스락바스락' 바닥에 깔린 낙엽을 밟으며 선자령을 향해 걸어갔다. 평소라면 많은 사람으로 북적일 등산로이지만, 비수기인 데다 평일이기 때문인지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드문드문 마주칠 때마다 "안녕하세요."하고 말을 건넨다. 일본에서도 등산할 때 마주치는 사람과 으레 인사를 나눴다. '이 외진 곳에 나와 같은 사람이 있구나.' 하는 반가움 때문일까?
산을 오르면서 오른쪽 발목으로 전해지는 감각을 확인했다. 통증은 거의 없었다. 양호했다. 덜거덕 거림이 미미하게 느껴졌으나 전보다 훨씬 나았다. 등산하기에 앞서 신발을 꽉 조여서 신은 덕분일까. 여느 때처럼 등산을 마치면 몸상태가 더 좋아질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 시간을 오르자 저 앞에 풍력 발전소가 보였다. 이제 정상까지 200~300미터만 남았다.
눈앞에서 본 풍력발전소는 엄청난 존재감을 발휘했다. 이토록 거대한 설비가 '부웅부웅' 소리를 내며 회전하다니. 게다가 그게 대관령에 수십 대나 있다니 말이다. 놀라울 따름이었다. 거대한 풍력발전소를 지나 마지막 오르막길을 올랐다. 2~3여 분 걸었을까. 수풀을 헤치고 올라가자 빈 공터가 나왔다. 눈앞에 선자령 비석이 우뚝 서 있었다. 정상이었다. 그 앞에 서서 새미와 자세를 취하며 정상을 오른 기쁨을 마음껏 누렸다. 감사하게도 맞은편에서 오신 분들이 여러 장 찍어주셨다. 우리도 찍어드렸다. 정상에 도착했다는 사실에 세찬 바람에도 추위를 못 느꼈다. 사진을 다 찍고 새미가 돌연 말을 꺼냈다. "그런데 말이야. 2~3km만 걸으면 된다고 하지 않았어?!"
새미에게 사실대로 고했다. '실은 가는데 3~4km라고. 왕복하면 아마 8~9km 될 것 같다.'라고. 웅얼거리듯 말하며 새미의 얼굴을 힐끗 살폈다. 새미는 '그럼 그렇지'하고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같이 표지판을 봤을 때만 해도 별말 없이 따라와 줬는데 그게 다 나를 배려해준 거였을까. 오래 걷고 싶은 내 마음을 눈치채고 말이다.
산 정상에 부는 거센 바람을 계속 맞다 보니 금세 땀이 식었다. 우리는 서둘러 대화를 끝내고 산을 내려갔다. 상하의를 바람막이에 타이즈 정도만 입어서 추위에 맞설 장비가 없었다. 곧이어 몸이 으슬으슬 추워졌다. 지금 시간은 오후 3시 10분. 해가 저물면 더 추워질 터였다. 발길을 재촉했다. 중간중간 급수와 에너지 젤, 단팥빵을 먹으며 에너지를 보충했다. 오로지 눈앞의 흙길만 보며 산을 내려갔다.
거의 쉬지 않고 걸은 덕분에 1시간 만에 등산로 입구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기뻐할 새가 없었다. 자동차를 주차해 놓은 대관령 휴게소까지 내려가야 했다. 거리를 확인했더니 1.8km였다. 몸은 이미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정상까지 오르며 흘린 땀도 대관령 바람에 의해 금세 식어버리고, 1시간 내내 바람을 맞으며 내려오다 보니 에너지는 이미 바닥난 상태였다. 주차장까지 버틸 수 있을까? 새미의 상태를 확인했다. 기진맥진해서 힘이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게, 가볍게 산책하는 줄 알고 왔는데 10km 넘게 걸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 테니까. '미안해 여보. 내가 집에 가서 잘할게!' 둘이서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걸었다. 휴게소에 설치한 풍력발전소를 지났다. 이제 거의 다 왔다. 10분, 5분, 2분 그리고 도착!! 으으 추워, 어서 차에 들어가자!!
차에 타자마자 시동을 켜서 온풍기를 틀었다. 그리고 온열 시트 전원을 켰다. 바로 출발하지 않고 십여 분을 시동만 켠 채 있었다. 바들바들 떨던 몸이 차즘 진정되었다. 추위로 바싹 움츠린 몸이 긴장을 풀어가기 시작했다. '아, 따뜻해. 살 것 같아.' 새미 또한 차 시트를 살짝 뒤로 젖히며 한숨을 놓았다. 미안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등산하러 왔는데 이토록 고생시켰으니 말이다. 조용히 새미의 손을 잡으며 말을 걸었다.
"미안해 여보. 그리고 고생했어."
"으응, 아냐 괜찮아. 다만 이렇게 많이 걸을 줄 몰랐지만 말이야."
"미안 미안. 오늘 저녁 뭐 먹으러 갈까? 여보가 좋아하는 걸로 먹으러 가자!"
"좋아! 몸이 으슬으슬하니 따뜻한 게 좋을 것 같아. 염소탕 어때?!"
"오오 염소탕. 좋은 선택이야. 어디 괜찮은데 알아? 나도 한번 알아볼게."
가게를 정하고 기어를 내려 자동차를 움직였다. 부웅하는 차 소리가 대관령에 고요히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