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의 일이다. 우유 재고가 바닥나 1층 무인 편의점으로 사러 갔을 때였다. 매장 끝 냉장고에서 200ml짜리 우유를 꺼내고 계산대로 향하자, 이미 그곳에는 초등학생 여자아이 4명이 옆으로 줄지어 계산하고 있었다. 각자 군것질할 간식을 손에 쥔 채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나이는 어림잡아 3, 4학년 정도 일까. 자기들끼리 까르르 웃고 떠드느라 뒤에 사람이 있는 줄 모르는 듯했다.
“난 마라탕 3단계까지 먹어봤어.”
“어땠어?”
“너무 맵지 않아 그거?”
어디에선가 10대들이 좋아하는 음식이 마라탕이나 로제 떡볶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내 학창 시절 때도 떡볶이와 불닭이 인기 있었기 때문인지, 매운 음식을 선호한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초등학생에게까지 영향력이 미칠 줄이야. 속으로 옛 기억을 끄집어내는 동안 시선이 그들의 손으로 향했다. 워터 젤리와 사탕, 초콜릿 등의 과자를 한 움큼 쥔 모습. 대화 주제와 정반대의 간식거리를 보며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이 인기척을 느꼈는지 뒤돌아서 나를 본다.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하길래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아이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어디선가 본 아저씨인데?”
“그래. 나 위층 아저씨야.”
“아~”
그들은 감탄사 하나만 남기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마라탕 이야기를 이어갔다. 계산을 마치고 문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나도 분명 본 기억이 있는데‘ ’부모님과 함께 매장에 놀러 온 아이였을까, 아니면 동네에서 걷다가 마주친 아이였을까. ‘ 생각이 날 듯 말 듯 한 느낌이다. 우유를 계산하고 매장으로 돌아갈 때까지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마지막까지 떠오르는 장면은 없었다.
평소 차분하고 조용한 동네는 초등학교 하교 시간이 되면 순식간에 왁자지껄한 분위기로 변한다. 학교에서 집까지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후다닥 소리를 내며 뛰어오는 아이. 우렁찬 목소리로 친구 이름을 부르는 아이, 책가방을 짊어지고 삼삼오오 무리를 지으며 내려오는 모습 등. 하교 시 동네 풍경은 시끌벅적한 오일장을 방불케 한다.
그중 내리막길 길목에 위치한 무인 편의점은 동네 아이들이 자주 찾는 장소이다. 하교하면서 아이들은 편의점 앞 벤치에 모여 게임을 하거나 뽑기를 뽑는다. 매장에서 군것질거리를 고르며 이야기 나누고, 편의점 앞에서 모인 후 가까운 아파트 놀이터로 가 뛰놀기도 하고, 편의점에서 우연히 다른 반 친구를 만나기도 한다. 동네 어린이들에게 있어 무인 편의점은 ‘만남의 광장’ 인 셈이다.
한동안 놀았음에도 아이들은 집으로 가기에는 아쉬운가 보다. 집에 가면 숙제를 해야 한다는 압박에서일까. 아이들은 조금이라도 늦게 들어가기 위해 우리 매장을 찾는다. 서가 한쪽에 진열한 <흔한 남매>, <전천당> <좀비 고등학교> 등의 만화책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카운터에 앉은 수염 난 아저씨의 문턱만 넘으면 안락한 소파와 의자가 기다린다. 카페 소파에 누워 만화책을 읽고, 의자에 앉아 색칠 놀이를 하고 또 앉아서 같이 게임을 해도 된다. 이곳에서는 누군가에게 눈총을 받을 일도, 꾸지람을 들을 일이 없는 것이다.
아이들을 가만히 두는 이유는 달리 없다. 어릴 적 내 모습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나도 학업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은 시기가 있었다. 부모님은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공부를 안 하는 나를 보며 적잖이 실망하는 모습을 비쳤다. 그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압박을 받았다. 어딘가 숨 돌릴 곳이 필요했다. 도피처 같은 곳이 있길 바랐다. 그때 자주 찾은 곳이 오락실과 만화책방이었다. 오락실 할머니는 나를 귀엽게 여겼는지 가끔 100원짜리 동전을 손에 쥐어 주었다. 하루가 멀다고 들락날락한 만화책방에서는 공짜로 만화책도 보고 자주 외상도 하며 지냈다. 두 곳은 나에게 있어 잠깐이나마 쉬어갈 수 있는 피난처이자 삶의 낙이었다. 매장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내 어릴 적 모습이 겹쳐 보인 것은 그 때문이었다.
지난달, 10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 셋이 매장을 찾았다. 아이들은 카운터 앞에 서서 메뉴판을 응시하다가 한참을 고민한 끝에 붕어빵(1,500원) 하나를 주문했다. 안에서 쉬고 싶지만, 음료를 사기에는 부담이 컸었나 보다. 나는 고개를 젓는 대신 매장 안에서 마음껏 책을 읽으라고 말했다. 편히 쉬고 물이 필요하면 카운터로 오라고 전하면서. 아이들은 처음에 주춤거리더니 얼마 안 있어 매장 안을 누비기 시작했다. 소파에 누워 만화책을 보고,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나 때도 그렇듯 그들도 숨통을 틀 곳이 필요했던 것이다.
다음 달이면 매장을 운영한 지 꼭 3년이다. 매일 숨 가쁘게 바쁜 날을 보내다 보니 세월의 흘러감을 깜빡한다. 3년이라는 시간의 흐름만큼 몸과 마음도 성장했을지는 미지수다. 대신 동네 아이들을 보며 그 사실을 실감한다. 1, 2년 전에만 해도 토실토실하고 귀여운 학생이 어느 날 볼이 쏙 들어간 모습으로 매장을 찾거나, 머리 하나는 더 커서 성인 키에 육박할 만큼 성장한 아이도 있다. 그런 아이들을 매장에서 혹은 동네를 지나면서 마주치고 인사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만큼 너희도 우리를 잊지 않았구나.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든다. 지금의 초등학생이 고등학생으로, 나아가 어엿한 성인으로 자랄 때까지 어딘가에서 본 동네 수염 아저씨, 책방지기 부부로 남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