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가을, 서점을 둘러보던 중 『오키나와에서 헌책방을 열었습니다』라는 책 한 권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저자 우다 도모코는 일본 대형서점 중 하나인 ‘준쿠도‘의 정직원. 본점에서 7년째 일하던 그녀는 오키나와 지점이 생긴다는 말에 자진해 나선다. 그러고는 2년만 일하고 돌아오라고 한 상사의 권유를 뿌리치고, 퇴사 후 오키나와에 헌책방을 내기로 결심한다. 책밖에 모르는 그녀가 아무 연고 없는 곳에서 매장을 차리기로 한 용기는 어디에서 왔을까. 일본에서 지낼 때 종종 준쿠도(본점)를 방문한 기억 때문인지 저자의 이야기가 실감 나게 다가왔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만의 책방을 차리고 싶다고 꿈꾼 것은.
강릉 이주 다음 해, 고래책방이라는 비교적 규모가 큰 서점에 취업했다. 내가 엄선한 책을 사람들이 읽는 모습을 보면 뿌듯한 마음이 들면서도, 아무렇게나 어질러 놓은 모습을 볼 때면 가슴이 아팠다. 책을 아끼고 사랑하는 입장에서 조심히 다뤄주길 바랐다. 하지만 세상 사람이 모두 나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은 아니었다. 서점에서 일하는 동안 뼈저리게 느꼈다. “이렇게 마음고생 할 거면 차라리 중고 책을 파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내 안에서 중고 책을 다루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서점에서 중고 책을 판다고 하면 의아한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있다. 그때마다 나는 환경 보호를 위해, 도서 매입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반품률을 줄이기 위해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늘어놓는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사실 변명에 가깝다. 이미 사람 손을 탄 중고 책이라면 조금 거칠게 다뤄도 마음은 덜 아플 테니까. 결국 나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중고 책’을 다룬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책방지기 입장에서 중고 책 판매는 마음에 짐이 쌓이는 일이다. 진입장벽이 높았던 도서 매입도 동네책방 수가 늘면서 수월해졌다. 변해가는 상황 속에서 여전히 중고 책에 큰 비중을 두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부채감을 덜기 위해 행사를 자주 열기로 결심했다. 저자 북토크, 출판사 대표 초청 강연을 통해 책방의 역할을 수행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처음에는 참가자가 1~2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꾸준히 행사를 열다 보니, 점차 소문이 나면서 많은 사람이 강연을 들으러 왔다. 작년에는 서른 가지의 크고 작은 행사를 진행했는데, 적게는 7~8명 많으면 20명이 넘는 방문객들이 매장을 찾았다. 덕분에 초청 작가에게는 소정의 강연료를, 적은 수이지만 도서도 함께 판매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지난달 두 사람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한 사람은 정명섭 작가님의 ‘나도 한번 웹소설 써볼까’ 강연을 들으러 동해에서 온 참가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김사강 연구원님의 ‘이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 강연의 참가자였다. 웹소설 강연을 들은 사람은 리X북스에 웹소설을 연재하는 작가가 되었다고 말해 주었다. 이주노동자 강연을 들은 사람은 러시아 이주민에 관심이 생겨 연구 보고서까지 작성했는데, 연말의 시민 자율 연구 부문에서 우수 보고서로 뽑혔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노력이 헛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씨앗은 나무에서 떨어져 나올 때부터, 무궁무진한 성장의 가능성을 품고 땅으로 내려온다. 강연을 들으러 온 사람들도 계기가 필요했을 뿐, 이미 성장할 준비를 갖춘 채로 아물다를 찾지 않았을까. 그것이 책 한 권이든, 작가의 말 한마디이든, 아니면 서점이 주는 분위기이든 말이다.
책의 형태도 e북과 오디오북 등 다양해지는 가운데, 서점의 역할이 비단 책을 파는 데에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책방이자 카페이자 상담 공간인 아물다는 앞으로도 ‘신간 도서 판매’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동네 문화 공간의 역할은 충분히, 아니 넘치도록 할 수 있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지역서점 인증 탈락의 아쉬움이 조금은 씻겨 내려간 듯하다. 그래, 다른 기회가 또 생길거야. 그러니 우리 능력이 닿는 한에서 책방을 꾸려나가 보자. 파이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