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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Dec 06. 2020

동치미는 타이밍이다.

요즘 에세이


몇 해 만에, 집에서 담근 동치미를 먹었다. 맨밥부터 라면까지 만인의 연인이 되는 음식인데, 반가웠다. 시원한 국물이랑 아작아작 씹어먹는 무의 식감이 잊혀지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런 묘미가 있는 행복한 겨울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노고는 불가피했다. 충주에 작은 집이 있는데, 거기서 무를 다 썰고, 나르고 하는 일을 했다.비주얼은 단순투박해보여도, 절로 되는 일은 없었다.깊은 맛이 나는 건 시간과 비례했다. 보름 정도 지나고 엄마가 충주에서 동치미를 집으로 가지고 오고나서 최근에야 맛보기 시작한 것이다.



어제 점심에 엄마와 밥을 먹으면서 물었다. 그동안 왜 동치미를 못 먹었냐고. 엄마는 올해는 충주에서 동치미를 담궈서 가능했지, 사실 서울에서는 도저히 동치미를 할 수 없다고 답했다.


동치미가 시원하려면, 그 온도가 중요한데, 서울의 겨울이 당최 널뛰기처럼 들쑥날쑥하니 동치미가 맛이 들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맞는 말이었다. 영상부터 영하까지 서울의 날씨는 기복이 심한 건 서울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니 서서히 익고 싶어도, 익을 수 없는 여건이 서울 땅이었던 것이었다.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되, 이루는 것은 하늘이다.


근데 동치미 뿐이겠나. 좋은 재료가 갖춰졌어도, 여건이나 타이밍이 뒷받쳐주지 못해서 결실을 못보는 일들이 많지않은가.


그런 가운데에 놓인다면 소위 "피땀눈물"서린 노고가 수포가 되는 건 찰나였다. 제갈량이 5번 만에 사마의를 잡을 기회를 맞았으나, 갑자기 내린 비 때문에 일을 그르친 것처럼 말이다.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되, 이루는 것은 하늘이다"라는 제갈량의 말이 요즘 가슴에 박힌다. 불행히도 요즘 '익지 못한 동치미'와 같은 결실들이 나에게서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노력의 문제라면 더 노력하면 되는 일이지만, 실상은 그런 외적인 요소 때문에 일이 곤죽이 된다. 어찌할 도리가 보이지 않는다.


누가 운도 실력이라는 말이 살짝 스쳐지나갔는데, 곧잘 수긍되지 않았다. 운까지 철두철미하게 준비를 해야한다면, 무척이나 답도 없는 인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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