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라니 Dec 12. 2020

차포떼고 이기라고 하시면...

짜치는 마케팅하다가 현타 온 이야기.  



장기를 두다보면 우스갯소리가 있다.


"야, 차포 떼줄까? 떼고도 내가 이길걸?"


바둑에서도 접바둑이 있듯이 장기에도 차포를 뗀다는 말이 있다. 바둑은 돌 위치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장기는 말 자체에 의미가 있다. 포(包)는 포대로, 차(車)는 차대로 구태여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갈 길은 정해져있다. 다만 서로에게 공평하게 말이 부여되는만큼, 하나라도 상대의 말을 먼저 잡아먹는 것이 승기를 잡는다.


그러나 차포를 떼고 시작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장기를 둘 수는 있겠으나, 소위 "나 잡아 잡수"이고,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다. 이기는 길을 생각하기 보다, 지지 않기 위한 방어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상대가 장기 입문자라면 모르겠으나, 어지간하면 상대의 공세에 혼을 뺐기게 된다. 질 수 밖에 없는 이미 정해진 판세인 것이다.



"기적을 일으켜보자구요?"



불행히도 중소의 마케팅은 이런 경우가 많다. 차포 없이 두어야하는 장기같이, USP(Unique Selling Point)는 고사하고 누구한테 팔고 싶어하는지도 광고주나 AE(Account Excutive : 광고주 관리 및 매체 제안하는 직책) 스스로 정의내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 내가 맡은 어느 브랜드가 그러했다. 광고주는 더 많은 회원 모집을 원했고, AE는 블로그와 배너광고 매체를 제안했고, 그것을 운영했다. 그러다 회원이 좀 모이니 욕심이 생겼는지, 특장점을 하나씩 빼기 시작했다. 회원가입시 제공하는 제안들을 하나둘 지우기 시작했다. AE는 한마디 말도 못하고, 오히려 마케터에게 와서 노출을 더 늘릴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브랜딩을 말했다.


"노출도 중요하고, 브랜딩도 중요한데, 아무것도 안했네? 어떻게 할꺼야?"


천연덕스럽게 브랜딩을 얘기했다. 셀링포인트가 없다고 했더니, 브랜딩이나 기업 아이덴티티가 있으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가입할 것이라는 논리를 아무렇지 않게 얘기해주었다. 그리고 쉽게 생각하라고 했다. 주어진 것에서 찾아보고, 무겁게 생각하지말고 쉽게 풀어보라고 지시했다. 


차에 기름이 없는데, 엔진은 있으니 어떻게든 굴러갈 수 있지 않느냐는 얘기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 광고주는 얼마 못가 내 손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AE가 새 프로젝트를 주면서 나에게 이 말을 했다.


"00씨, 지난 번 그 건 때문에 입지가 좋지 않은 거 알죠? 우리 이걸로 기적을 일으켜보아요^^"


말은 좋았지만, 자세히보니 다시 차포 없는 장기판을 들이밀었다. 나는 이내 현타가 왔다.





불행히도 많은 마케팅 회사가 이런 일이 비일비재할 것이다. 특히 대한민국이라는 특성상, 광고나 마케팅 제안은 인간에 준하는 안드로이드 취급을 받는다. 어느 책의 제목처럼 '심플하지만, 화려하게 해주세요'라고 말 한마디면, 다 끝날 것 같이 말한다. 


그러니 크리에이티브는 기대할 수 없고, 평범하고 멀끔한 레퍼런스를 토대로 제작하게된다. 인간의 몸으로 인간에 준하는 '안드로이드'가 되어 소위 짜치는 일들만 해야하니, 스트레스도 화도 많아진다. 결국 하루하루 나갈 궁리만 찾게 된다.

작가의 이전글 동치미는 타이밍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