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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래분수 Nov 09. 2021

사건의 진상

지금만 할 수 있는 일

서울 부모님 댁에 있다. 한 달 여정이 예기치 않게 두 달 넘게 늘어졌다.

엄마는 고기 먹지 않는 내가 왔으니 고기 요리를 꼬박꼬박 준비하신다. 엄마에겐 목표가 있다. 막내딸 살 찌우기. 2년 만에 만난 딸이 너무 말라서 충격적이었다고 말씀하셨다. (전적으로 엄마 관점임)

나는 엄마가 해주시는 대로 먹는다. 엄마 밥상엔 나물 반찬도 많기에 아쉬울 건 없다. 무엇보다 누군가 차려준 밥상 앞에서 불만이 있을 순 없지. 내 집에서 차려 먹는 음식이나 엄마 밥이나 똑같이 배불리 먹었다고 생각하지만, 돌아서면 다르다. 엄마 밥은 간식이 필요 없다. 저녁 식사 끝에 숟가락을 놓으면 미련 없이 이를 닦을 수 있다. 엄마 밥은 영혼까지 채워준다.


그런데 매 끼니 고기를 먹이려던 엄마가 달라졌다.

내가 잠시 병원 신세를 져야 했는데, 그 뒤로 두부를 대여섯 모씩 사신다. 적어도 하루 한 모는 먹자며. 아이가 아프면 얘가 지금 뭘 먹고 싶을까, 생각하시곤 하던 엄마. 이번엔 내가 먹고 싶은 게 두부일 거라고 생각하셨나 보다.


내가 퇴원하고 얼마 뒤, 엄마가 뱃병을 얻으셨다. 평생 소화기관에 문제없던 분이 속이 불편해서 밤잠 설치며 화장실을 들락거리셨다고 한다.

나는 자리에 누운 엄마 대신 엄마 부엌에 섰다. 두부를 으깨어 버섯과 케일을 썰어 넣고 자박자박 끓여드렸다. 엄마가 먹고 싶은 게 뭘까 생각하진 못 했다. 뱃병 났을 때 먹으면 좋겠다 싶은 걸 만들었다. 그것도 겨우.

내 부엌이 아니라서 뭘 할지 모르겠다는 핑계를 대본다. 핑계 참 궁하다.

두 달 동안 끼니마다 꼬박꼬박 뭔가 새로운 걸 만들어준 엄마에게 나는 한 끼조차 제대로 대접하지 않은 게 진상이다. 책 만든다고 아프다고 회복 중이라고 그래서 시간이 없다고…

신간 홍보는 나중에 하면 더는 신간 홍보가 아니다. 그래도 책은 어디 가지 않고 얌전히 창고에 앉아 팔리길 기다려줄 테다.

하지만 얼마 뒤면 엄마 밥은 못 챙겨드리겠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하자고 다짐하며 잠을 청한다.

내일은 다를 거야! (제발)




“칠십팔억 지구인 속에서 내 존재는 너무도 작지만, 나는 하루 세끼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세끼만큼의 변화를 원한다면, 에세이 <플렉시테리언 다이어리> 책 훑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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