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소 도움 없이 만드는 크루아상
슈퍼마켓에서 파는 비건 버터의 주원료는 식물성 기름과 물, 소금이다. 여기에 아나토annatto라는 관목의 씨를 감싼 과육으로 노르스름한 색을 내고, 천연 방부제(젖산), 천연 유화제(대두 레시틴), 천연 산화방지제(토코페롤)를 선택적으로 쓴다.
주재료인 기름 종류에는 야자 코코넛 카놀라 해바라기씨 아마인 대두 올리브 등이 있는데, 보통 이들을 섞은 혼합유를 사용한다. 대두와 카놀라 같은 대표적인 유전자 조작 식물이 원료로 들어가기 때문에 가능한 유기농 제품을 고른다. (미국에서 유기농 인증을 받은 제품은 기본적으로 None-GMO다.) 한국에서도 구할 수 있는 멜트Melt 제품은 유기농에 더해 '공정무역 거래 야자유'와 '열대우림 보호' 인증까지 받았다.
우리가 자주 가는 슈퍼마켓에서 구할 수 있는 식물성 버터 브랜드는 네댓 개 이상이다. 여기에 맛과 향, 재료 배합이 다양하니 브랜드마다 버터 종류도 몇 가지씩 된다. 350~450g짜리를 3~5달러 정도에 파는데, 우리는 할인할 때 사둔다. (멜트 제품은 한국에서 약 두 배 가격에 판매된다.)
평소에 버터를 쓸 일은 거의 없다. 남편이 일주일에 두어 번 토스트에 조금 발라 먹는 정도다. 그렇게만 먹으면 한 통으로 팔구 개월쯤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구태여 비건 버터를 논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크루아상을 좋아한다. 크루아상을 만들려면 버터가 필요하다.
이사 후 페이스트리는 다시 먹을 일이 없어졌지만, 크루아상만은 여전히 생각난다. 그래서 집에서 만들기 시작했다. 식물성 버터만 있다면 크루아상도 문제없다! 버터 외에 밀가루, 설탕, 소금, 물만 있으면 된다. 만드는 법도 몇 가지만 지키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반죽과 충전용 버터를 차게 유지하는 게 중요한데, 반죽은 미리 만들어 하룻밤 정도 냉장하고, 성형할 때 반죽과 버터 온도가 오르기 전에 재빨리 끝내면 모양도 꽤 그럴듯하다. <플렉시테리언 다이어리> 102쪽
정말 쉬울까? 나는 그렇다고 본다. 반죽은 재료가 잘 섞이는 정도면 된다. 크루아상이 어렵게 여겨지는 건 아마도 여러 번 접어 펴기와 성형 때문일 테다. 그런데 반죽과 성형은 내가 제과제빵에서 제일 좋아하는 단계다. 효모 덕에 살짝 부푼 밀가루 반죽을 만지는 재미가 좋다. 그래서 초승달 모양 페이스트리를 만드는 건 특별히 더 즐겁다.
(그리고 3시간 후..)
이럴 수가! 크루아상 반죽 성형에 들어갔는데 완전히 망했다. 이렇게 망한 건 처음이다. '처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웬만해서는 실패에 껴주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크루아상 반죽에 버터가 질척하게 달라붙으면, 뭉쳐서 냉장고에 잠시 넣었다가 다시 밀고 계핏가루 뿌려 시나몬롤을 만든다. 완성 모양은 처음 목표와 다르지만, 맛은 좋으니 먹기 위한 목적은 달성했다. 그래서 실패는 아니다.
제과제빵을 자주 하진 않는다. 최근 삼사 년 동안 했던 제과제빵이 한 서른 번쯤 된다고 치자. 그중 최소 29번은 제빵사 입장에서 보면 실패다. 제빵사의 눈높이를 갖지 않은 보통 사람이 보기에도 15번 정도는 실패로 칠 수 있다. 하지만 내 기준으로 보자면 (오늘 포함해서) 딱 두 번이다. 한 번은 산타루시아 번을 만드는데, 너무 뜨거운 물을 쓰는 바람에 효모가 죽어 돌 같은 빵을 구워낸 적이 있다. 빵의 생명인 효모를 죽였으니 실패다. 나도 인정할 건 인정한다.
오늘 크루아상 실패에는 무려 세 가지 요인이 있다. 귀리 우유 양을 재다가 잠깐 딴생각을 하는 바람에 1/4컵을 더 넣은 것 같다. 그리고 빵 한쪽에서 소금 맛이 느껴진다. 재료를 제대로 안 섞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냉장고 온도가 너무 낮아 반죽이 반쯤 얼었다.
천천히 기다렸다면 소생시킬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 오랜만의 실패가 충격이었던 걸까, 마음이 급했다. 차가운 반죽 덩어리 주변을 초초하게 서성이다가 체온으로 녹이며 대충 밀어 폈다. 송장처럼 뻣뻣한 반죽은 밀리기보다 찢어졌고, 녹기 시작한 버터는 반죽과 따로 놀며 질척거렸다.
무참히 찢어지는 반죽을 다독여 돌돌 말았다. 뚝뚝 썰어 팬에 올리고 구웠다. 기름진 밀가루떡이 되었지만, 진한 커피에 곁들여 먹을만하다. 실패 이유를 곱씹으면서 다시 새 반죽을 만들어 냉장고에 넣었다. 내일은 성공하길..
성형 중 반죽이 얇은 부분으로 버터가 삐져나올 수 있다. 안 그래야 모양 잡기가 수월하지만, 일단 터진 부분은 너무 괘념치 말자. 스크레이퍼로 반죽을 뒤집어서 버터가 삐져나온 부분이 안쪽으로 말리도록 성형한다. 버터가 터져서 너무 질척한 반죽이나 자투리 반죽은 따로 모아서 일정하게 모양을 잡아 굽는다. 그 안에 초콜릿/건포도/견과 등을 넣어 구울 수도 있다. <플렉시테리언 다이어리> p.103
내게 겨울은 크루아상의 계절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 젖소 도움 없이 크루아상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스럽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 마침 함박눈이 내리고, 못생겨도 맛은 좋은 크루아상이 있고, 비로소 겨울도 시작되었다. 모두 따뜻한 연말 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