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비행기 표를 구매할 때였다.
목적지까지 가는 직항이 없어서 한번 갈아타야 하는 비행이었는데, 가격 비교에 더해 마일리지 양도 및 사용 가능성까지 따져야 했다. 남편이 노트북과 휴대전화를 붙잡고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이 하고 있을 땐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법. 나는 정성을 담아 간식을 준비하기로 했다.
“여보, 살사 소스에 또띠야 칩 먹을래 아니면 과일 먹을래?”
이 간단한 질문에 남편은 이렇게 대답했다.
“어… 음… 난 지금 결정할 게 너무 많으니까 자기가 알아서 줘.”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을까? 부엌을 서성이면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두 가지를 모두 준비했다. 우리는 이렇게 심한 선택 장애를 앓고 있다.
그런 남편이, 게다가 소고기 스테이크를 좋아하는 남편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채식을 결심할 수 있었을까? 며칠 하다가 말겠지, 하고 가볍게 생각했기 때문일까?
남편의 제안으로 우리가 채식을 시작한 건 2016년 1월이었다. 그전까지 우리는 매주 닭고기나 칠면조 고기, 다진 소고기에 소시지, 베이컨, 햄, 우유, 달걀, 치즈를 샀다.
남편은 밀크커피와 피자, 스테이크를 아주 좋아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유를 넣지 않은 아메리카노는 안 마시고, 피자 중에서도 두꺼운 도우 위에 치즈를 묵직하게 얹은 시카고 피자를 꽤 높이 사며, 스테이크는 적당히 핏빛을 머금은 ‘미디엄 웰던’을 선호한다. 우리가 만나고 그가 처음으로 나를 저녁 식사에 초대한 날 준비한 음식도 소고기 스테이크였다. 그는 하루 한 끼는 꼭 고기를 먹어왔고 결혼 후 나도 그렇게 식단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나는 날고기, 해삼, 홍어를 빼면 거의 모든 음식을 잘 먹는 편이다. 다양한 고기 음식 중에서도 추어탕과 개구리 고기 요리를 특히 좋아한다. 그렇다고 고기 없이 못 살겠다는 아니고 맛있게 잘 먹는 정도라고 할 수 있다. 한때는 고기가 별로 먹고 싶지 않아서 멀리한 적이 있는가 하면, 간혹 운동을 시작했을 땐 닭가슴살이나 삶은 달걀을 일부러 챙겨서 먹었고, 언젠가는 한의사 조언에 따라 밀가루와 커피를 끊기도 하는 등 남들 하는 대로 주변에서 좋다는 대로 변덕스럽게 식생활을 해온 것 같다.
그랬던 우리가 어느 날 완전 채식을 실천해 보기로 했다. 계기는 한 기록영화였다.
당시 나는 열대우림 파괴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다가 <카우스피러시Cowspiracy>*라는 기록영화를 알게 되었다. ‘소cow’와 ‘음모conspiracy’라는 두 영어 단어가 교묘하게 하나가 되었으니, 남편은 이걸 보고 나면 고기를 못 먹는 것 아니냐며 주저했다.
그러다가 해를 넘기고 며칠 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아내가 그걸 꼭 보고 싶은데 노트북과 연결된 텔레비전을 어떻게 시작할지 모르겠다는 궁색한 이유로 며칠 동안 징징대자, 남편은 네가 정 그렇게 나를 끌어들이겠다면 함께 봐주지 하며 같이 소파에 앉았다.
영화는 생각과 달리 적나라한 고기 생산 과정을 말하지 않았다.
대량 축산업과 낙농업계의 전방위로 펼쳐지는 막강한 로비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는데, 내가 지지하던 환경단체들이 이 사슬에 깊이 연루되어 있어 충격이었다.
이 기록 영화가 말하는 몇 가지 불편한 진실을 추리면 다음과 같다.
▪ 현재 세계는 전 지구인이 먹고 남을 작물을 재배하지만, 매일 약 십억 명이 굶주리고 있으며, 생산 작물의 50%는 가축 사료용으로 쓰이고 있다.
▪ 가축이 배출하는 온난화 가스는 자동차/트럭/기차/배/비행기가 뿜는 양을 합한 것보다 훨씬 더 많다.
▪ 대량 축산업과 낙농업은 지구 온난화와 수자원 고갈, 삼림 파괴, 생물 종 감소, 해양 산소 부족의 주범이다.
▪ 현대 어획의 주요 시스템인 거대 어망으로 생선 1kg을 얻으려면 그보다 다섯 배 많은 다양한 해양 생물들(고래, 돌고래, 상어, 바다거북 등)이 그물에 함께 걸려서 죽는다.
▪ 그러나 관련 기업의 후원을 받는 환경단체들은 이를 모른 척하고 있다.
▪ 햄버거 하나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물의 양은 두 달 동안 샤워할 수 있는 양과 맞먹는다.
▪ 육류, 생선, 해산물, 달걀, 우유를 먹지 않아도 건강에 문제가 없다.
영화가 끝난 뒤 남편이 예상치 못한 말을 했다.
"그럼 우리 한번 고기 없는 삶을 살아보자!"
나는 당황했다. 고기랑 치즈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한 말이라서 그렇기도 했지만, 우리가 그리 오랫동안 지킬 수 있는 일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용감했다. 나는 삶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면서도 왠지 번거로울 것 같고 자신 없기도 해서 못 한 말을 남편은 입 밖에 뱉고야 말았으니까. 그래도 나는 여전히 나를 (사실 남편도) 믿을 수 없어서 튕겨보았다.
"왜 그래? 그러려고 보자고 한 거 아니야."
"당장 내일부터 하자."
"진정해. 하더라도 조금씩 천천히 하든가 해야지, 갑자기..."
"그냥... 고기랑 유제품 없이 내가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알고 싶어."
"흠... 알겠어. 그럼 내일은 두부 넣고 된장국 끓일게!"
그렇게 간단히 우리는 채식을 결심했다.
우리는 고기 맛을 좋아한다. 맛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고기가 어떻게 밥상까지 오르는지는 알 필요가 없었다. 슈퍼마켓에서 돈만 내면 되니까. 우리가 먹는 삼겹살과 구제역으로 매몰당하는 돼지 뱃살은 좀처럼 연결되지 않았다. 병에 걸렸다고 산 채로 자루 속에 넣어지는 닭들을 보면서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매해 그런 일이 벌어지기 때문일까? 아니면 텔레비전 화면으로 보았기 때문일까? 꿈틀대는 자루가 구덩이에 던져지는 걸 보면서도 언제 다시 안심하고 통닭을 먹을 수 있을까 안달하는 게 더 현실적인 고민이었다.
그런데 한 편의 기록영화가 우리 무관심에 의문을 던졌다. 이 영화는 대량 축산업과 낙농업, 수산업이 엄청난 자원과 에너지, 그리고 생명을 소모한다고 밝힌다. 하지만 환경단체들조차 고기와 생선 및 유제품의 지나친 생산과 소비를 말하기 꺼릴 만큼 이 산업구조는 우리 사회에 강력한 힘을 행사한다. 그렇다면 이 비효율적인 구조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믿을만한 존재는 누구일까?
"몇 년에 한 번 있는 선거의 한 표보다 매일 쓰는 돈이 현실을 움직이는 데 강력한 힘이 될 수 있다."
(와타나베 이타루, 정문주 옮김, 시골 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더숲, 2014)
그렇다. 쥐꼬리만 하더라도 나는 돈을 쥐고 있고, 그 돈을 매일 쓰면서 무심코 어떤 기업들을 지지하고 있다. 나는 하루 세끼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사회, 윤리, 환경적으로 올바르게 운영되는 일에 내 힘을 보태고 싶었다. 내가 의지하는 땅과 물, 공기의 자연스러운 순환을 거스르지 않고 키운 음식을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사실 남편과 내가 이 결정을 내리는 데는 이 기록영화가 설명한 햄버거 사례 하나로 충분했다. 햄버거 하나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물의 양이 두 달 동안 샤워할 수 있는 양과 맞먹는다니! 이 진실은 양치하고 샤워하고 설거지하면서 절약한 물보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의 물을 확실하게 아낄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날 밤 햄버거는 물론 피자, 계란말이, 멸치볶음, 닭볶음탕, 곰국, 해물 칼국수 등 수없이 평범한 음식들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우리는 지구를 위해 식사 습관을 바꾸기로 했다.
“칠십팔억 지구인 속에서 내 존재는 너무도 작지만, 나는 하루 세끼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세끼만큼의 변화를 원한다면, 에세이 <플렉시테리언 다이어리> 책 훑어보기!
*<카우스피러시Cowspiracy> 홈페이지에서 영화를 사고 내려받거나, 영화 관련 참고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아쉽게도 한국어 자막은 없지만, 그림과 도표 등 그래픽을 활용한 덕분에 내용 흐름을 따르기가 수월하다.
* <카우스피러시> 공식 예고편
https://www.youtube.com/watch?v=nV04zyfLyN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