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한 집을 지키기 위해.
@오랫동안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던 읽기 기록 하나를 발행해 봅니다. #정이현
2017년 새해에는 현대문학상 수상집으로 읽기를 시작했다. 새해맞이 여행을 떠나며, 가방에 넣을 책을 고심했다. 결론은 단편 소설이다. 단편 소설 한 편을 읽는 데 필요한 시간은 길어야 3-40분. 비행기를 탔다가 기내식이 나오기 전까지. 섬으로 이동하는 배를 타곤, 바다 풍경을 즐기다 이제는 그만 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때부터 섬에 도착할 때까지. 수영하러 간 아이들이 잠깐 엄마의 손 없이 잘 노는 시간에... 그 시간에 깔끔하게 읽기 좋은 게 내겐 단편 소설이다.
새해에는 단편 소설을 좀 더 열심히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복직을 하니, 출근을 조금 일찍 한다면, 어쩌면 하루 30분쯤 읽은 것에 대해 기록할 수 있는 시간이 꾸준히 생길 수도 있겠다. 그럼 더 좋을 테다. 국어 선생이 매일 소설을 읽고 글을 쓴다는데, 그걸 직장에서 한다고 직무 유기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게 그 첫 글이 되려나? 이젠 좀 살았다고 지키지 못할 약속은 새해에 확언하지 않는 능구렁이가 되었다.
2017 현대문학상 수상작은 김금희의 '체스의 모든 것'이다. 김금희 작가의 작품을 요즘 한 권의 소설집이 아니라, 이런저런 수상 소설집에서 읽고 있다. 그런데 꽤 많이 읽었지 싶다. 요즘 말로 하면 핫한 작가다. 그리고 수상 소설집 뒤편엔 역대 수상 작가의 최근작들이 소개되어 있다. 김채원, 박성원, 윤대녕, 정이현.
그중 정이현 작가는 내게 소설을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라는 충격을 느끼게 해 준 작가 중 하나다. 좀 오래전 친한 친구랑 전화 통화를 하는데, 회사 도서관에서 <<낭만적 사회와 사랑>>이라는 소설집을 빌려 읽었다고 했다. 충격적이니까 꼭 읽어 보라며. 그 친구가 느낀 충격은 내게도 고스란히 옮겨 왔다. 이제까진 쓰이지 못했던 것들, 하지만 소주 한 잔 따라 놓고 오랜 친구들과 수다를 떨 때 충분히 등장하고도 남았을 법한, 어쩌면 야하다고 할 수도 있을 이야기가 멋지게 잘 버무려진 소설. 지금 애 둘 낳은 아줌마가 돼서 생각해 보니, 그 정도의 소설을 읽고 야하다며 야단법석을 떨었으니 참 순진했다 싶기도.
여하튼 정이현 작가는 그 이후 꼭 챙겨 읽는 작가가 되었다. 지난 연말, 정이현 작가의 소설집, <<상냥한 폭력의 시대>>를 읽었다. 소설집 제목은 내가 요즘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것들을 콕 집어 말해 주고 있었다. 얼른 집어 읽지 않을 수 없었던 그 소설집의 뒤에서 두 번째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이 현대문학상 수상집에 실린 '서랍 속의 집'이다.
엄마가 된 이후, '집'은 나의 거의 모든 것이다. 결혼 전엔 내가 쉬는 곳, 이 다 였던 이 곳이 사랑하는 내 아이들이 자는 곳, 먹는 곳, 쉬는 곳, 노는 곳, 공부하는 곳이 되었다. 또한 내가 사랑하는 유일한 남자가 쉬는 곳이며, 그가 나와 함께 하는 곳이기도 하다. 얼마 전 어디선가 북유럽 사람들의 높은 행복감은 따스한 집안 분위기에서 온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어쩌면 북유럽 스타일의 인테리어 광고를 하는 글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북유럽 스타일이 여기 동방의 나라에서 인기가 높은 것도 그 디자인의 탁월함이 행복감을 높이는데 일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좋아 뵈는 건 다 비싼 자본주의 사회이지만, 사람들은 그냥 좋아 보이기만 하는 것엔 비용을 쉽게 지불하진 않는다. 행복을 느끼게 해 줄 것으로 예상되는 것이어야 사람들은 지갑을 연다. 인테리어 감각은 별로 없는 나이지만, 집안에 어떤 투자를 하면, 좀 더 편안한 일상을 꾸릴 수 있을지 일 년에 몇 번쯤은 고민한다.
우리 부부는 결혼을 하고 서울 근교에 있는 신도시에 위치한 자그마한 오피스텔에서 반 전세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거기서 반년도 못 살았는데, 첫 아이가 생겼다. 꽉 막힌 오피스텔은 입덧이 심한 임신부가 살고, 곧 태어날 아이가 살기엔 용이하지 않은 곳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부랴부랴 근처의 작은 아파트로 이사할 계획을 세우고, 집을 구했다. 이미 오피스텔에 살면서 매월 몇십 만원씩 월세를 내 본 경험이 있는 우리는, 그냥 은행빚을 왕창 내서 집을 사기로 했다. 월세 대신 이자를 낸다 치고, 우리 명의로 된 집을 갖기로 말이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자주 이사하는 번거로움을 겪지 않아도 될 터였다. 그리고 이자로 낸 돈이 미래에 집값이 상승된 만큼을 넘어 서기 전에 은행빚을 갚아 버린다, 가 우리의 계획이었다. 그 계획이 얼마 지나지 않아 하드코어 라이프를 선사하는 계획이었다는 걸 파악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고, 은행빚과 싸우며 우린 이제 결혼 9년 차가 되었다. 전세살이를 했다면 4번을 이미 갱신하고, 한 번 더 살고 있을 시간. '서랍 속의 집'은 그런 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서랍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전세계약서나 매매계약서는 '집'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전세 자금 대출의 이자, 신용카드 대금, 고만고만한 적금 몇 개, 보험료, 아이의 보육료, 각종 공과금과 아파트 관리비를 전달에 외상으로 쓰고 다음 달에 갚아가는 이 소설의 유원과 진과 같은 사람들의 집.
집값을 올려 달라고 문자메시지로 전달하는 집주인과, 역시 메시지로 전세금 반환을 요구하는 세입자. 스마트폰 앱으로 띵똥, 메시지 한 번이면 어쩌면 어마어마 하달 돈이 타인에게 옮겨 가는 전세 계약의 참으로 가볍고도 무거운 순간.
이렇게 내가 이사를 가려면 누군가는 어디론가 이사를 나가야 하는.
그 여자의 태연한 설명을 듣다 보니 이것은 커다란 도미노 게임이며, 자신들은 멋모르고 중간에 끼어 서 있는 도미노 칩이 된 것 같았다. 종내는 모두 함께, 뒷사람의 어깨에 밀려 앞사람의 어깨를 짚고 넘어질 것이다. 스스로 포개지며 쓰러질 것이다. (본문 중)
그리고 결국은 스스로 포개지며 쓰러진 누군가를 응시하며, 이 소설은 끝이 난다.
나는 멋모르고 중간에 끼어 나도 모르게 누군가가 넘어지도록 밀고 있다. 이게 편안하고 행복한 나의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멋모르고 우리가 만들어내는 슬픈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