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와이, <동생>을 읽고
- 세밑에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소설
홍콩은 추억이 있는 곳이다. 직접 가본 건 손에 꼽을 만큼인데도 그렇다.
헬로, 강시~!, 헬로, 홍콩~!
어릴 때, 비디오 가게 단골이었던 나는 홍콩을 영화로 먼저 만났다.
부모님이 가게 일로 바쁘셨던 시절, 동생들과 집에서 강시가 나오는 홍콩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20대에는 낯선 이들을 모집해 배낭여행을 떠났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 생각하면 대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을까 싶다. 그땐 너무 어려서 사람을 쉽게 믿었던 걸까. 지금 다시 그런 여행을 하라고 하면 못 할 것도 없겠지만, 그때와 달리 망설이는 마음이 앞설 것 같다. 누군가를 덥석 믿기에는 그 시절보다 겪은 일이 많아졌고, 쌓여가는 경험치는 오히려 심장을 조금 더 보수적으로 만들어 가는지도 모른다.
홍콩은 신혼여행 중 잠시 경유했던 곳이기도 하다. 딱 한 번 홍콩에 와봤던 경험을 살려 내가 남편의 가이드가 되었다. 공항에서 잠시 빠져나와 '영화의 거리'를 걸었고, 유명 딤섬 가게에서 부드럽고 말캉한 하가우를 맛보았다. 신혼여행의 기분을 내며 페닌슐라 호텔에서 애프터눈 티 세트도 즐겼다. 이 문장을 쓰다 시계를 보니 마침 차 한 잔이 어울리는 시간이 되었다. 마침 하나 남은 얼그레이 티백을 꺼내 예쁜 잔에 우려 본다. 차 향기와 함께 그때의 기억이 조금 더 선명하게 피어오를지도 모르니까.
차 한 잔을 타는 수고를 덧붙여 보았지만, 사실 앞서 나열한 관광의 기억은 어렴풋하다. 하지만 딱 하나의 장면은 진하게 남아 있다. 홍콩 첵랍콕 공항을 향해 날던 밤 비행기 안은 무척 추웠다. 내가 잠 못 들고 뒤척이자 신랑이 슬쩍 담요를 덮어 주었다. 그땐 그런 소소한 배려에 설렜다. 남편은 아마 잊어버렸을 기억일 것이다. 그런데 그 이후로 그 사람이 내게 다시 이불을 덮어 준 적이 있었나?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 대목을 쓰며 생각한다. 다시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면, 내가 추운지 끊임없이 살펴주는 사람과 하고 싶다고. 마흔 줄에 접어든 한 여자의 야무진 기대이자 결심이다. 아마 다음 생에나 이루어질 일 같지만 말이다.
작가 찬와이의 홍콩, 『동생』
작가 찬와이의 소설 『동생』을 온전히 읽어내기 위해, 나는 내 안의 모든 홍콩을 단전부터 길어 올렸다. 그리고 이 소설은 독자인 나의 홍콩에 관한 새로운 기억이 되었다.
이 소설 속 가족의 삶은 홍콩의 정치적 상황을 투영하는 하나의 알레고리로 읽히기도 한다. 내게는 들르기 좋은 관광지였던 홍콩이,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는 삶의 터전이자 추위에 떨 때 담요를 제일 먼저 덮어주고 싶은 동생 '탄커러' 같은 존재인 것이다.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며 '하나의 중국'이라는 단일함에 안도한 이들도 있었겠지만, 그것이 홍콩을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소설 속 기성세대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대한민국에 사는 나 또한 그 불확실함을 다음 세대와 나눠 가져야 했던 애틋한 마음이 한편 이해가 된다. 만약 대한민국도 통일을 맞이한다면, 그 이후의 세계가 요구하는 현실을 후대가 마주하게 될 때, 어른들의 마음 한 가지는 애틋함일지도 모른다.
소설은 홍콩 반환 일주일 전인 1997년 6월 25일에 시작된다. 열두 살 소녀 탄커이는 첫 실연을 겪고, 같은 날 남동생 탄커러를 처음 만난다. 부모님의 불화로 불안한 가정 안에서 그녀는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가출을 감행하고, 이는 유괴 소동으로 번진다. 그녀는 어디든 동생과 함께하려 한다. 믿을 수 없는 부모 곁에 동생을 홀로 두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동생과 사랑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누나였다"(p.130). 커러는 단순한 가족 구성원 그 이상의 의미였다. 탄커이가 세상을 견디기 위해 붙잡는 유일한 온기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동생을 향한 그녀의 회고를 읽는 내내 묘한 설렘이 느껴졌다.
커러는 누나의 사랑과 극성맞은 엄마의 기대를 받으며 잘 자라지만, 사회운동에 참여한다. 여기부터가 우리가 아는 홍콩의 우산혁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산혁명이 있었던 2014년은 대한민국 또한 비통한 해였다. 나는 둘째를 임신한 채로 퇴근하면 집에서 허망한 바다가 나오는 풍경을 보고 앉아 있었다. 입덧이 무척 심했다. 매일 욕지기를 했고, 속이 너무 울렁거려서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무정한 세상에 아이를 또 어떻게 낳느냐며 괴로워했다. 내 몸의 괴로움을 겪고, 우리 안의 집단적 우울에 동참하느라 홍콩의 우산혁명이 자세히 어떤 것인지, 그들이 어떻게 실패했고 어떤 우울을 건너갔는지에 대해 잘 몰랐다.
『파친코』의 강렬한 첫 문장처럼 역사는 대다수를 버리지만, 우리는 그 문장과 상관없이 살아가기도 한다. 21세기에 겪었던 광장의 경험을 통해 생각했다. 역사를 이끈다고 약속된 표상들이 정말 우리에게 그토록 중요한 존재일까. 그들이 없어도 세상은 돌아가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우리는 매번 집단적인 우울에 빠졌던 걸까. 어쩌면 물리적으로 한 울타리 안에 앉아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고, 같이 있었기에 또 그 말을 듣지 않을 도리가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다시 같은 일을 겪는다 해도 우리는 또 그렇게 할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것이 집단 기억이 가진 물리적, 구조적, 근본적 힘임을 깨닫는다. 타국인들이 공유하는 기억을 읽으며, 내가 속한 공동체가 함께 떠올릴 수밖에 없는 기억들을 되새겨 본다.
소설 속 격정적인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읽는 동안 마음이 오히려 편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문체가 스토리를 배반하는 듯한 이 느낌은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책 말미 추천사에는 "찬와이는 플롯과 언어를 의식적으로 느슨하게 활용한다"(p.292)는 평이 적혀 있었다.
세밑, 차를 마시며
어느덧 잔 속의 얼그레이는 적당히 식어 마시기 좋은 온도가 되었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표지의 '동생'이라는 단어에 호기심을 내비췄던 남매를 생각해 본다. 탄커이와 탄커러와 같은 이 남매가 훗날 마주할 세계가 내가 겪은 것보다 더 차갑고 불확실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애틋해진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거창하게 역사의 방향을 틀 순 없어도, 아이들이 추위에 떨 때 조용히 담요 한 장을 덮어주는 일, 이 책처럼 따뜻한 이야기들을 곁에 놓아주는 일 아닐까. 한 해를 마무리하는 세밑, 이 따뜻한 감정을 기록으로 남기며 내 곁의 모든 '동생'들에게 마음의 담요를 내밀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