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영, <식물의 책>, <식물과 나>를 읽고
아이 앞에 놓아주고 싶은 마음
아이가 자라서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때부터다. 그 무렵 내게 자연스럽게 주어진 과제가 있었다. 아이와 손을 붙잡고 지나다니는 길가에 자라는 꽃과 나무, 풀의 이름을 아이에게 알려주는 일이 그것이었다.
“아이야,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 존재들로 가득 차 있단다.” 그런 메시지를 난 식물을 비롯한 만물의 이름을 일러주는 일을 통해 세상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작은 아이에게 전하고 싶었나 보다. 그러려면 내가 먼저 꽃과 나무, 풀의 이름을 알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아는 식물의 이름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무렵부터 식물들의 이름을 틈틈이 공부하기 시작했다. 길 가다가 이름 모를 식물을 발견하면 사진을 찍고, 도감에서 그 식물이 무엇인지를 찾았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아이와 주로 다니는 길에서 볼 수 있는 식물들의 이름을 대부분 알게 되었고, 아이에게도 일러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일은 그리 쉽게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서울 근교 신도시에서 볼 수 있는 식물의 종류가 그리 많았던 게 아니어서 약간의 품을 들였더니 길가의 웬만한 식물 이름은 익힌 기분이었으나, 계절이 지나니 식물들은 모습을 또 바꿔 버렸다. 꽃을 보고 알았던 나무의 이름은 여름이 되면 잎을 보고 알 수 있어야 했고, 겨울이 되면 나뭇가지의 질감이나 아직 새들에게 먹히지 않은 열매의 모양을 보고 알 수 있어야했다. 이 과제를 얼추 해결하는 데에는 꽤나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식물의 세계를 알수록 넓고 방대하여 지금도 길을 걷다보면 새로운 식물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그 때 그 과제를 아직 끝내지 못했다는 기분이 되기도 한다.
이소영의 <식물의 책>은 내 나름의 식물 이름 익히기 과제를 열정적으로 수행하던 몇 번의 계절이 지나고, 시간이 더 흘러 새로운 아이가 또 태어나고, 그 아이도 훌쩍 자랐을 때에야 만난 책이다. 이 책엔 도시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식물들의 이야기가 식물세밀화가인 작가가 정성껏 그린 세밀화와 함께 엮여 있다. 작가와 식물과의 러브 스토리를 읽고 있자니, 식물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알아 가던 즐거움이 일상을 사로잡았던 그 시절로 되돌아 간 것만 같았다. 당시의 난 식물의 이름을 하나 더 알게 되면, 그 만큼 더 정성을 다해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식물들의 이름을 마음 속으로 호명하며 걷고, 어쩌다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새로운 식물을 만나면 사진을 찍고 기록하며 걸었다. 난 본업이 식물과 관련된 일이 아니지만, 이소영 작가가 새로 출간한 책 <식물과 나>에서 식물들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 여긴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그런 마음이 내게도 그 시절 움텄던 것이구나 한다.
길가의 풍경을 점점이 이어가는 식물들을 바라보며 걷는 일은, 무작정 목적지를 향해 걷는 일과는 다르다. 식물들에게 하나 하나 눈길을 주고 걷노라면, 나의 살아있음을 의식하는 밀도가 확연히 달라진다. 한 걸음 걸으면 ‘꽃마리’라는 친구가 또 한 걸음 걸으면 ‘민들레’가, 그 다음엔 ‘오랑캐꽃’이, ‘현호색’이 ‘팬지’가 ‘이팝나무’가 ‘향나무’가…내게 말을 걸어줄 친구들이 자꾸만 다가오는 끝없이 다정한 길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친구로 그득한 그 길은 나 자신의 ‘살아있다’는 의식을 드높여 준다. 쉽게 말하면 살맛나는 것이다.
이 글을 쓰며 생각하니, 나를 살맛나게 하는 그 친구들을 이소영 작가처럼 예쁘게 그려줄 재주가 내게도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내겐 아직 그런 재주가 없다. 언젠가 정호승 시인의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라는 시집을 읽으며, 이 시집엔 나무에 관한 시가 참 많다, 시인이 되려면 나무에 대해 많이 알아야 하나보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화가처럼 식물 그림을 그릴 수 없다면, 시인처럼 꽃에 관한 멋진 시를 쓸 수 없다면, 길에서 만나는 식물 친구들에 대한 생각만이라도 자꾸만 할 수 있다면 어떨까. 그러다가 한 줄씩 그 생각을 글로 써보고, 조금 더 생각이 많이 난 날은 두 줄도 써보고, 세 줄도 써보고 하면 어떨까. 그럴 수 있다면 분명 더 살맛 날 것이다.
<식물과 나>의 214쪽에서 작가는 산사나무 열매가 익어갈 때면 그 곁에서 붉은 열매를 사진으로 찍기도 하고, 얼마간은 나무 아래 가만히 서 있어보기도 한다. 열매를 자세히 들여다 보기도 하고, 열매의 크기를 자로 재고, 잎의 색을 기록한다. 중국인 친구가 들려준 산사나무에 얽힌 이야기를 떠올리기도 한다.
그래, 식물학자처럼 마주치는 식물 앞에 조금 더 길게 멈춰 서야겠다. 사진을 찍고나면 그 옆에 가만히 서 있어 보기도 하고 냄새를 맡아 보기도 해야겠다. 누군가 그 식물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귀 기울여 듣기도 해야겠다. 그것이 나를 살맛나게 했던 가까운 식물 친구들과 더욱 깊은 우정을 나누는 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