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SNS에서 개연성과 핍진성에 대한 열띤 논의가 오가는 것을 보았다. 문학 비평 용어인데도 꽤 주목받는 개념이구나 싶어서 나름의 정리를 해보고자 한다.
문학 수업을 하다 보면 개연성에 대해 언급하게 되지만, 이는 독자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편차가 커서 정답을 요구하는 출제의 대상이 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또 설명하지 않고 지나가기에는 소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이다.
다시금 들춰본 <소설학 사전>(한용환)에서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했다. ‘개연성’이라는 독립된 표제어 대신 ‘그럴듯함(Plausibility)’이라는 표제어가 쓰이고 있었다. 개연성과 핍진성을 둘러싼 용어의 혼란이 재생산되는 양상을 볼 때, 차라리 교과서에서 ‘그럴듯함’이라는 표현을 소설의 특성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삼는다면 이해가 쉬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이 사전의 상세한 설명을 읽어 보니, 이 용어가 누구의 개념으로 쓰이느냐에 따라 그 층위가 달라짐을 알 수 있었다.
그럴듯함(Plausibility) : 경험의 재현이 타당하고 적법스러운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럴듯함의 개념은 개연성(probability)이라는 말과 무관하지 않다. 다시 말하자면, 두 용어의 기능은 똑같이 허구 이야기의 공간에 독자를 이끌어들이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나 행위의 모방은 개연성을 가져야 된다고 말하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개연성은 모방의 대상을 지칭한다. 즉 모방의 이상은 행위 자체를 재현해 내는 데 있지 않고 행위들을 지배하는 보편적 원리를 재현해 내는 데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신비평가들이 주로 문제 삼는 그럴듯함의 개념은 수사적 기능에 훨씬 가깝다. (중략) 이렇게 살피게 되면 신비평이 문제 삼는 개념의 요체가 무엇인지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럴듯함이라는 말은 소설이 진술하는 사건이 현실과 가지는 관련성을 판별하는 개념이 아니고 이야기의 서술이 그것 자체로 자족스러운가 아닌가를 판별하는 개념이다. (하략) (p.61)
이 대목에서 개연성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이라면 마땅히 그러할 것이라는 철학적·윤리적 차원의 모방을 개연성의 핵심으로 보았다면, 신비평가들은 작품 내부의 예술적 완성도와 유기성에 주목한다. 즉, 신비평의 관점에서는 이야기가 외부 현실과 얼마나 닮았느냐가 아니라, 그 이야기의 맥락 안에서 구조적·수사적으로 얼마나 자연스러운가라는 ‘자족적 구조’를 문제 삼는 것이다.
현재 문학 교과서에서 주로 다루는 ‘개연성’의 개념은 후자인 신비평의 논리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텍스트 외부의 보편적 진리보다는 텍스트 내부의 구성 요소들이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그럴듯한’ 완결성을 갖추었는지를 따져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핍진성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소설학 사전>은 이를 구분하여 정리하고 있다.
핍진성(Verisimilitude) : 제라르 쥬네트의 용어인 vraisemblance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용어로, 박진감이라는 말로도 번역된다. 이 용어는 문학에서 실제적인 것보다는 그럴듯함(plausibility)에 호소하는 오랜 전통, 혹은 서사물들에 사실적인 신빙성을 부여하는 오랜 관습과 관련되어 있는데, 관습(convention)이나 자연화(naturalization)에 관한 논의와 더불어, 이 용어의 개념은 쥬네트, 조나단 컬러 등의 구조주의 이론가들에 의해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바 있다. 구조주의 비평가들에게 문학에 있어서의 핍진성과 자연화는 동일한 맥락을 지니는 개념이다. 자연화의 개념은 서사물의 생산이나 수용이 이루어지는 관습적 토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서, 서사적 관습을 자연화한다는 것은 곧 그것이 지닌 관습적 성격 자체가 의식되지 않은 채로 서사물의 생산자나 수용자의 의식 속에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략) (p459.)
결국 핍진성이란 텍스트가 독자에게 ‘진실처럼’ 받아들여지게 만드는 문화적·서사적 관습이자 약속이라 할 수 있다. 개연성이 작품 내부의 논리적 고리(신비평적 관점)를 의미한다면, 핍진성은 독자가 그 세계관의 규칙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만드는 ‘자연화’의 과정인 셈이다.
가령,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의 첫 문장에서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아침 거대한 벌레로 변한다는 설정은 현실의 보편적 법칙이나 인과율, 즉, 개연성의 관점에서 보면 낙제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람이 벌레가 될 확률이나 이유는 그 어디에서도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 사전의 '핍진성'에 관한 설명을 적용해 보면, 독자는 이 황당한 설정을 곧 ‘자연화’한다. 벌레가 된 몸으로 문고리를 돌리려 애쓰는 처절한 동작, 침대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버티는 감각, 그리고 벌레가 된 아들을 보며 슬퍼하기보다 생계를 걱정하는 가족들의 냉혹한 반응이 지독하리만큼 사실적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독자는 벌레가 된 '사건' 자체는 믿지 않더라도, 벌레로 살아가는 '고통'과 '일상'에는 깊이 몰입하게 된다. 작가가 구축한 텍스트 내부의 세밀한 수사적 장치들이 독자로 하여금 이 세계 안에서는 이것이 진실이다라고 믿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개연성과 핍진성의 정도를 최종적으로 판별하는 것은 독자의 주관적 영역이다. 물론 소설의 기법이나 장르적 관습을 능숙하게 다루는 설계자로서의 지위는 작가가 우위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관습이 작품 속에서 얼마나 매끄럽게 '자연화' 되었는지를 판정하는 최종적인 목소리는 독자에게 돌아간다.
작가가 구축한 세계관과 독자가 지닌 기대가 충돌할 때, 독자는 이야기의 흐름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이질감과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이는 단순히 독자가 작가보다 많이 알아서가 아니라, 작가가 설계한 논리와 관습적 약속이 독자의 내면에서 설득력을 얻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독자의 비평은 그 주관적인 '이질감'과 '불편함’의 근거를 텍스트 내부에서 찾아내어 상호 주관적인 설득력을 얻어내는 과정이 될 수도 있다.
문학 수업에서 개연성을 다루는 일은 정답을 찾는 과정이라기보다, 작가의 설계와 독자의 수용이 어느 지점에서 만나고 어긋나는지 확인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오늘 이 글을 쓰며 상기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