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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아이 환 Feb 03. 2024

1월 21일의 책

서경식, <나의 미국 인문 기행>

서경식 선생님의 '인문 기행' 시리즈의 마지막 권인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을 읽었습니다. 선생님(이하 선생님)께서는 작년 12월 17일에 마지막 원고를 출판사로 보내시고, 다음 날 영면에 드셨다고 합니다. (p4) 이듬해 1월 20일에 이 책을 읽기 시작했으니, 전 무척 뜨거우면서도 동시에 차가워진 책을 펼쳐 든 셈입니다. 생의 끝에 근접하실 때까지 원고를 쓰실 만큼 독자들에게 그토록 전하고 싶으셨던 메시지가 무엇이셨는지, 안타까움과 감사한 마음으로 천천히 읽어 보았습니다.


현재의 세상은 제국주의도, 전체주의도, 공산주의도 모두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지구상에 끝까지 살아남아 권위 있는 가치가 된 자유민주주의가 위태로워 보입니다. 차별주의자 도널드 트럼프라는 인물이 미국 대통령 후보로 부상한 것을 두고 많은 이들은 이 세상이 또 어떻게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신호로 받아들였습니다.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있는, 인류를 위기에 빠뜨렸던 과거가 다시 재현될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큽니다.


현대사에 드리워진 세상의 어두운 변화를 모두 겪으며, '재일조선인' 2세로서 '경계인'이라고 칭하는 삶, 조작 사건의 피해자인 가족을 위해 긴 시간 구명 운동을 했던 삶을 사셨던 서경식 선생님. 저는 헤아리기 어려운 삶을 사셨던 선생님의 시선과 감각을 통해 미국으로 가봅니다. 세상을, 타인을 그리고 선생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였던 예술을 바라다봅니다. 권력이 사람들을 어떻게 호도하는지, 사람들이 맹신하는 가치를 권력이 어떻게 이용하는지, 그러한 흐름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자들은 누구인지, 그들은 어떤 고통을 어떻게 겪었는지, 그 고통에 대하여 무엇을 함께 느끼고 생각해야 하는지, 예술이 세상의 아픔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말입니다.        


p18 그 와중에도 나는 머무르던 도시에서 짬이 나면 혼자서 미술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결사적인 반독재 투쟁이 이어지고 있는 시기였다. 형들은 옥중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 다만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듯, 좋은 미술 작품과 조우하기를 바라며 떠돌아다니는 일이 내 자신의 생존에 필요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p29 30년 전 / 이때 느낀 기시감은 이런 장소에 와본 적이 있다든가, 이런 풍경을 본 적이 있다는 식의 감각과는 조금 다르다. ... p33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다. 30년 후에 찾아온 데자뷔의 감각이 그때의 긴장감과 불안을 또렷이 되살려냈다. 여행은 끝나가고 한산한 카페에 B씨와 나란히 앉아 있었던 그날, 호퍼의 그림이 머릿속에 떠올라 '아아, 나는 지금 저 그림 속에 있는 것 같아.'라고 그때 생각했다.


p47 나는 카리타 마틸라의 노래에 도취되면서 동시에 세계 전체가 몰락해 가는 어두운 예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p67 그중에서 뜻밖에 발을 멈춘 채 넋 놓고 본 작품이 바로 조지 벨로스의 <이 클럽의 두 회원>이었다. 정말이지 당시의 내 기분과 어울리는 작품이었다. 보고 있자니 말로 이루 표현 못할 처참함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복받쳐 올라왔다. 단순히 주먹질을 하는 행위뿐만 아니라, 이를 구경거리로 삼아 도박을 하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닌 너무나도 명백한 어리석음과 잔혹함. 그것은 억울한 정치범 여덟 명을 순식간에 처형해 버리는 행위, 야당 정치가를 공항에서 사살하는 행위와도 어딘가 서로 통한다.   


p123 사상가, 정치가로서 리베라는 패배자다. 하지만 나는 그런 리베라를 우습게 여길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p129 그 위대함은, 먼저 참화 한가운데서 철저하게 철저하게 이를 응시하며 기록하고자 했던 정신에서 기인한다. 만약 인류 전체가 죽음으로 절멸한다면 그 기록은 누가 보게 될까.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쓴다는 행위(그린다는 행위)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들은 이런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있는지는 차치하고  일단 용감하게 맞섰다. 이는 '인간'의 가치를 주장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p137 윌러스틴은 이 논쟁을 이라크 전쟁 이후의 세계정세 문맥 속에서 상세히 분석했다. 그는 선진국이 간섭을 정당화하는 것이 예전에는 '종교'를 내걸며 이루어져 왔지만 현대는 '인권'이나 '민주주의'를 앞세우는 방향으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p177 1972년 나는 교토에서 <사형대의 멜로디>를 봤다. 영화를 통해 그때까지는 표면적인 이해에 그쳤던 벤 샨이라는 화가를 재발견했다. 그 무렵 두 형이 서울에서 군사재판을 받았고, 그중 한 명에게 사형이 구형됐다. ... p189 이러한 인생이 그려낸 궤적 자체가 내 눈에는 정말이지 '미국적'인 특성으로 보인다. 벤 샨이었기에 유럽도 일본도 아니라 미국에서 예술을 꽃피울 수 있었다. 그야말로 '선한 아메리카'의 예술을.


p206 나는 사이드에게 음악이라는 측면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꽤 늦게 깨달았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 매년 여름 잘츠부르크 음악제를 찾으면서 서양 고전 음악의 깊고 넓은 세계를 만나 그 경험을 <나의 서양음악 순례>라는 책으로 그럭저럭 펴냈을 무렵에야 사이드에게서 음악이 가진 중요성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내 경험은 "'재일조선인'이라는 존재인 자신에게 '서양음악고전'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라는 질문에 관한 답을 더듬어 찾아가는 일이었다. 그랬던 나는 사이드만이 할 수 있는 언급을 읽고 크게 공감했다.   


이 책을 읽으며, 인상적인 문장을 발췌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 보였습니다. 선생님께서 떠올리신 그 감각이 순간의 인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 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저의 기억을 위해 몇 문장을 옮겨 봅니다. 선생님께서 쓰신 새로운 글을 더 이상 읽을 수 없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하는 수 없이 이 책을 시작으로 그간 쓰신 책들과 그 책에서 언급하신 책과 음악, 그림에 대해 찾아보는 시간을 가져 봅니다. 어떤 책을 만날 땐, 독자로서 빚을 졌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 책이 그랬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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