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잡설들 10
중국 역사에서 호족(豪族)이란 대체로 지방에 근간을 둔 토착세력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호(豪)는 호걸이나 호협을 가리키고, 족(族)은 특정한 가문을 중심으로 하는 혈연적 특징을 의미합니다. 즉 호족이란 ‘특정 가문을 중심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구축한 지방 세력’이라고 해석하면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겁니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호족들 중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서주의 미씨 집안(미축, 미방)이나 양주의 육씨 집안(육손, 육항) 등입니다.
다만 실제로 호족이라는 단어 자체가 그리 많이 쓰이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찾아보니 정사 삼국지를 통틀어서 단 두 번 사용되었네요. 위서 창자전과 오서 보즐전에 나옵니다. 그러면 주로 어떤 표현이 자주 쓰였는가 하면, 이런 식입니다.
호강(豪强) / 호우(豪右) : 호걸들의 집단
대족(大族) / 거족(巨族) : 큰 동족집단
대성(大姓) / 거성(巨姓) : 큰 성씨집단
거가대족(巨家大族) / 호문대족(豪門大族) : 하여튼 대단한 집단(...)
이 외에도 호족과 비슷한 표현들이 무수하게 많은데 굳이 하나하나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거든요. 여하튼 핵심은 호족들이 지방의 실세였다는 거지요.
춘추전국시대를 지나 진나라와 한나라가 들어서면서 중앙집권이 보다 강화되었음은 잘 아실 겁니다. 군국제니 군현제니 하는 제도들은 고등학교 세계사에서도 비중 있게 언급되지요. 그러나 중국은 너무나도 큰 나라였고, 지금으로부터 무려 이천 년 전 인류의 역량으로는 지역 말단까지 중앙정부의 영향력을 온전히 투사하는 게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이러한 호족들이 지방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중앙에서 임명된 지방관들도 호족들의 협조를 얻지 못하면 제대로 통치하기가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수도에서 가까운 지역은 사정이 나았습니다. 하지만 멀리 떨어진 곳일수록 호족의 세력이 더 강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중앙권력이 무력해지는 난세에는 더더욱 그러했지요. 예컨대 유표 같은 경우에는 형주자사로 임명된 후에도 치소(治所. 해당 지역을 다스리는 관청이 위치한 곳)가 있는 무릉군까지는 아예 가지도 못하고 멀찍이 남군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후 남군의 유력한 호족이었던 채씨와 괴씨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서 반대파 호족들을 처리하고 나서야 비로소 형주를 장악할 수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호족들은 대체 어떤 수단으로 그런 영향력을 구축한 것일까요?
전국시대에는 이른바 식객(食客)이나 빈객(賓客), 혹은 객(客)이라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이는 당대의 세력가나 유력자들에게 의탁하는 자들입니다. 세력가나 유력자들은 이들에게 의식주를 제공하였고, 그 반대급부로 빈객들은 개인의 능력을 바쳐 그들을 섬겼습니다. 즉 사적인 주군과 신하 관계를 구축한 겁니다. 맹상군이니, 신릉군이니 하는 이들은 엄청난 수의 식객을 거느린 것으로 이름이 높았지요.
한나라 시대에도 이러한 객(客)들은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후한 말엽의 혼란기에 이르러서는 더더욱 그랬지요. 각 지역의 호족들은 안전과 부귀를 제공하면서 앞다투어 객을 모았고, 객은 자기에게 땡전 한 닢조차 준 적이 없는 황제나 지방관리가 아니라 자신을 먹이고 입히고 재워 주는 호족을 섬겼습니다. 자연스레 이들은 호족의 사적인 힘, 즉 사병집단이 됩니다. 호족에게 무력이 더해진 겁니다.
호족들은 그러한 영향력과 무력을 통해 지방에서 실세로 행세했고, 때로는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삼국지를 보면 도적(賊)을 토벌했다는 말이 유난히도 자주 나옵니다. 막연하게 보면 무슨 산적떼 같은 느낌이고, 물론 흑산적이나 황건의 잔당처럼 실제 도적떼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상 이들은 그 지역의 호족세력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중앙권력이나 군웅들에 대항해 반기를 들었으니 적(賊)으로 간주된 거죠. 기존에 호족들이 누리고 있었던 세력 혹은 권력을 빼앗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대결이었던 겁니다.
물론 삼국지의 군웅들이 항상 호족들과 대립했던 건 아닙니다. 때로는 회유하여 자신의 세력으로 삼거나 느슨한 동맹 형태로 힘을 합치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호족들이 먼저 머리를 숙이고 자발적으로 귀부해 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떤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호족의 협력을 얻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었기에, 호족을 어르고 달래는 건 군웅들에게 있어 필수적인 과제였습니다. 특히 군웅들은 해당 지역에 자신의 기반이 없는 경우가 많았기에 더더욱 그랬지요.
더군다나 당시 군웅들의 휘하에 든 자들 중 대다수가 그러한 지역 호족 출신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군웅들의 부하면서도 동시에 잠재적으로는 적이기도 했어요. 코에이 삼국지처럼 무조건 주군에게 충성을 다하는 꼭두각시가 아니라, 크루세이더 킹즈처럼 아무리 잘 대해줘도 수틀리면 즉시 배신을 때리고 나한테 자객을 보낼 수도 있는 그런 존재였다는 뜻입니다. 이건 단순한 망상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위협이었습니다. 실제로도 손책이 굴복시킨 허공이 남몰래 조조에게 줄을 대다 발각되어 처형당했고, 그 식객들이 살아남아 손책을 습격하여 끝내 원한을 갚은 사례도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지의 군웅들이 이러한 호족들을 대하는 방식에 저마다 확연한 차이가 있어서 꽤나 흥미롭습니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