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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May 11. 2021

삼국지의 ‘협’이란 무엇이었나

삼국지 잡설들 09


  고대 중국 사회에서는 ‘협(俠)’이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의리’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데, 거칠게 설명하자면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권력에 굴종하지 않지만, 의리를 중시하고 약한 사람을 돌보며 강자에게 항거한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무협지를 즐겨 보는 분들이라면 익숙하게 여겨질 법한 개념이지요. 


  과거 중국은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범위가 넓었던 데다 난세 또한 잦았기에 자력구제에 가까운 이러한 개념이 숭앙되었습니다. 특히나 중국이 수십 개 국가로 나누어져 서로 치고받았던 춘추전국시대에는 더욱더 그랬지요. 그래서 사마천은 사기를 저술하면서 따로 ‘유협열전(游俠列傳)’을 남겼습니다. 그 양반의 서술을 보면 협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유협(游俠)은 그 행동이 비록 정의롭다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말에는 믿음이 있고 행동에는 과감함이 있다. 한번 승낙한 일은 반드시 지켜 자신의 몸조차 돌보지 않고, 남이 곤경에 빠졌을 때는 목숨마저 개의치 않고 돕는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고, 공덕을 드러냄을 오히려 수치로 여기니, 대체로 모두 칭송하기에 족하다. (...) 무리를 지어 횡포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의 재물로 가난한 자를 부리고 폭력으로 약한 자를 괴롭히면서 스스로 만족해하나, 유협(游俠)은 오히려 이를 부끄럽게 여긴다.  (사기 유협열전)


  그러면서 사마천은 다섯 명의 유협에 대해 기록하는데 이들은 주가, 전중, 왕공, 극맹, 곽해라고 합니다. 이중 주가는 그야말로 협객(俠客)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인물입니다. 백 명이 넘는 호걸들을 위험에서 구출하였으면서도 자신의 공은 일절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또 넉넉하지 못한 사람들을 두루 돕는 데 재물을 썼기에 막상 자신은 무척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계포라는 장수의 목숨을 구해주었으면서도 보답을 바라지 않았고 훗날 계포가 존귀한 몸이 되자 오히려 왕래를 끊었다고 하죠. 


  반면 곽해는 좀 다른 부류입니다. 강도짓이나 위조화폐 제작, 도굴조차도 서슴지 않았으며 때로는 별다른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기조차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남의 목숨을 구해주고 은혜를 많이 베풀었기에 젊은이들은 그를 사모하면서도 또한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곽해의 조카가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술을 권하다가 화가 난 상대에게 칼로 살해당했는데, 곽회는 자초지종을 들어본 후 자신의 조카가 잘못한 것이라면서 그 상대방을 놓아주었다고 합니다. 그 일로 인해 곽해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고 하네요. 


  이 두 사람이 나란히 ‘유협’으로 다루어진 것을 보면 이른바 ‘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이 가실 겁니다. 즉 고대 중국인들은 엄중한 법과 규정보다 더 우선시되는 행동 원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주군과 신하 관계든, 주인과 빈객 관계든, 혹은 친구 관계든 간에,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보답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였고 원한 또한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법을 어기는 일조차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중범죄자인 곽해 같은 인물이 오히려 주위의 존경을 받았던 겁니다. 


  자. 그럼 이제 삼국시대로 넘어가 볼까요. 




  사실 이러한 ‘협’의 개념은 세상이 혼란스러울수록 더 힘을 발휘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안정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사적인 정의를 갈구할 수밖에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후한 말엽에서 삼국시대로 이어지는 시기는 그야말로 난세였죠. 그 결과 삼국시대에도 ‘협’은 여전히 숭앙받습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선 하후돈이 있습니다. 그는 십대 중반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가 스승을 모욕하자 그를 죽여 버렸습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자신도 아니고 스승이 고작 욕 몇 마디 얻어들었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인 것이니 흉악한 살인마가 분명하죠. 그러나 당대 사람들은 그런 그를 오히려 강직한 기풍이 있다면서 추켜세웠습니다. 그가 딱히 처벌을 받았다는 기록도 없네요. 물론 집안의 위세가 꽤나 대단했던 이유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다음에는 전위를 볼까요. 전위는 지인의 원수 집에 잠입하여 그와 아내를 죽인 후 추격병을 뿌리치고 탈출했습니다. 그리하여 호걸로 알려졌다고 하네요. 하후돈과 마찬가지로, 사적인 이유로 사람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칭찬을 받은 겁니다. 


  서서도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임협을 좋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원한을 갚았습니다. 이점은 전위와 동일하네요. 하지만 서서는 도망치다가 붙잡히고 맙니다. 곧 처형당할 처지였지만 다행히도 같은 패거리들이 그를 구원해준 덕에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지요.  


  허공의 빈객들도 인상 깊지요. 손책이 허공을 죽인 후, 그의 빈객 세 명은 암중모색한 끝에 홀로 사냥에 나선 손책을 습격하여 그를 다치게 하였고 끝내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말 그대로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 가면서 주인의 원한을 갚은 셈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을 아시겠지요? 모두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이른바 ‘의(義)’를 위해서 엄청난 일들을 벌인 겁니다. 이렇듯 삼국시대에도 ‘협’의 개념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협을 바람직하게 여겼던 건 아니었습니다. 어쨌거나 이러한 행동들은 결국 사적 제제에 불과했고 엄연히 국법을 어긴 것이었으니까 말입니다. 국가의 입장에서 이러한 사사로운 원한 갚음은 용인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서 같은 이는 관아에 붙잡혀서 죽을 위기에 처했다가 그야말로 간신히 벗어나기도 하였지요. 


  또한 이런 방식으로 남의 원한을 갚았다는 건 동시에 새로운 원한을 만들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죽였다면, 누군가가 그 원한을 갚으려 들지 않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반복해서 원한을 만들어내고 또 되갚기를 끊임없이 되풀이한다면 마지막에 남는 건 서로가 서로를 죽고 죽이는 아수라장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래서 협에 따라 행동한 후에는 먼 곳으로 도망치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쓴 글에 언급한 태사자가 대표적인 사례겠네요. 태사자는 자신의 상관, 즉 자신의 주인을 위해 주(州)의 공문을 파손하고 죄 없는 관리를 속여 넘기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행동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자에게도 수하나 빈객들이 있을 테고, 협의 원리에 따르면 그들이 태사자를 찾아와 보복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지요. 그래서 태사자는 즉시 변방으로 도망쳐서 목숨을 보전했습니다. 관우 또한 본래 하동군 해현 사람이었지만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탁군 탁현으로 망명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태사자와 비슷한 연유가 아니겠는가 하는 추측도 있습니다.  


  이러한 ‘협’에 대한 추종은 시대가 흐르면서 조금씩 옅어집니다. 중국이라는 거대 국가의 중앙권력이 점점 더 강해지면서, 그에 따라 법적 체계가 정비되고 또한 절차적 정당성이 중시되다 보니 본질적으로 사적 정의의 형태를 띤 협은 배척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원리로서 협이라는 개념 자체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중국 역사 전반에 걸쳐 끈질기게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이러한 당시의 개념에 대해서 이해한다면 조금쯤 더 즐겁게 삼국지를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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