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곰 May 15. 2020

화타, 방술이 아닌 의술

삼국지의 인물들 29

  화타의 자(字)는 원화(元化)입니다. 또다른 이름은 부(敷)라고 하네요. 삼국지연의에 등장하여 관우의 팔뚝을 가르고 독을 긁어낸 일로 유명합니다만 사실 그 의사는 화타가 아닙니다. 화타는 관우가 형주를 공격하기 십 년도 전에 죽었으니까요. 심지어 화타는 스스로를 학자로 생각하였으며 의원으로 여겨지는 현실을 마뜩찮게 여기기조차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명의로서 사서(史書)에 당당히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게 그가 바라던 바였을지 아니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화타는 서주 패국 초현 사람입니다. 즉 조조와 동향 출신입니다. 오래도록 학문을 닦아 경전에 통달하였다고 합니다. 패국의 상(相)인 진규, 또 태위였던 황원이 연달아 그를 천거할 정도였으니만큼 명성이 있는 학자였던 셈입니다. 그러나 화타는 그런 추천을 모두 거절하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습니다. 대신 양생과 의술에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그런 걸 보면 아무래도 당대의 현실에 회의감을 품었던 모양입니다.  


  정사 삼국지에도 정말이지 만화에나 나올 것 같은 온갖 신기한 일화들이 잔뜩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전부 다 믿을 수는 없습니다. 개중에는 꽤나 그럴듯한 것도 있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굳이 다 적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화타가 의술의 대가로 인정받았다는 점은 확실해 보입니다. 왜냐면 당대의 권력자 조조가 그를 불러 곁에 두었거든요. 


  당시 조조는 두통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재발이 잦았다는 걸로 보아 아마도 편두통이 아닌가 싶습니다. 화타는 침을 써서 조조의 증세를 어느 정도 완화시킵니다. 그러나 단번에 완전히 낫게 할 수는 없는 병이었습니다. 오래도록 곁에서 치료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헌데 당대의 권력자 곁에서 주치의 역할을 하면 부귀영화가 보장될 텐데도, 화타는 그게 내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거짓으로 아내의 병을 꾸며 고향으로 돌아간 후 조조가 몇 차례나 거듭해서 불렀는데도 가지 않았습니다.  


  조조는 점차 마음이 다급해졌습니다. 아무리 제일가는 권력자라 해도 병자로서 의사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이치였습니다. 조조는 서주로 사람을 보내 화타의 동태를 살피도록 합니다. 만일 화타의 아내가 정말로 아프다면 화타의 휴가 기한을 늘려주고 위문품도 보내라고 명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화타가 거짓말을 했다면 잡아들여 허도로 압송하라고 했지요. 그 결과 끝내 화타의 거짓말이 드러납니다. 


 격분한 조조는 화타를 끌고 옵니다. 순욱이 그를 용서하라고 간언했지만 조조는 이미 마음을 굳인 뒤였습니다. 천하를 위해서는 이런 쥐새끼가 없어야 한다고 선언한 조조는 화타를 가혹하게 고문합니다. 화타는 결국 매질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하지요. 죽기 전에 옥의 관리에게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책’이라며 자신의 의술서를 건네지만, 처벌을 두려워한 관리는 거부합니다. 그래서 그 책은 결국 화타 자신에 의해 불태워지고 말았습니다. 


  화타가 죽은 후에도 분을 풀지 못한 조조는 두통을 겪을 때마다 투덜거립니다. 이건 어차피 못 고칠 병인데 한낱 돌팔이가 잘난 체했을 뿐이다, 설령 그자가 살아 있었더라도 끝내 고치지 못했을 거다 하고요. 그러나 이후 사랑하는 아들 조충이 어린 나이에 병에 걸려 죽자 그때서야 뉘우치면서 화타를 죽인 걸 후회했다 합니다. 




  당대에는 이른바 양생(養生)을 설파하며 자기가 백 살이 넘었다거나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좌자, 우길, 극검, 감시 등입니다. 대부분 사기꾼 혐의가 짙습니다만 당시 사람들은 또 그런 걸 많이 믿기도 했지요. 이러한 방술사들에 대한 조조의 두 아들, 조비와 조식의 견해가 기록으로 남아 있어 꽤나 흥미롭습니다. 


  우선 조비는 기본적으로 그런 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방술사를 따르는 자들의 오만가지 추태를 기록했지요. 예컨대 신선이 되겠다고 복령을 먹다가 이질에 걸린 사람이라든지, 호흡법을 익히다가 기절한 사람 등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크게 비웃었습니다. 한편 조식은 기본적으로 방술사들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아 ‘간사한 무리와 결탁해 사람들을 속이고, 요사한 짓거리로 백성을 미혹시킨다’고 했습니다. 또 직접 감시와 더불어 대화한 후에 입만 살고 실질은 없는 괴이쩍은 놈이라는 식으로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극검이라는 자와 함께 백여 일을 살면서 정말로 곡기를 끊었는지를 직접 확인해 보았는데, 정말로 밥을 안 먹고도 그대로이니 대단하다는 식으로 감탄하기도 했지요. 


  이런 걸로 보아 당대의 상류층은 방술사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혹시나 하는 기대감 역시 지녔던 것 같습니다. 삼국시대에서 근 이천 년이나 지난 현대에도 고위층 인사들이 유명하다는 점쟁이를 방문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을 보면 아무래도 사람에게는 뭔가 ‘신묘한’ 것을 믿고 싶어하는 본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화타를 그런 사기꾼들과 동일하게 취급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는 적어도 스스로 백 살이 넘도록 살았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서에도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믿었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반면 그는 최대한 능력을 발휘하여 사람들을 치료했고, 실제로 많은 이들을 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금희라는 일종의 체조를 만들어서 전파히기도 했지요. 물론 이천 년 전의 의학이 지금과 같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최대한 의술을 베풀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병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화타는 당대 사람들이 두려움을 없애고 고통과 죽음을 피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마치 현대의 의사들처럼 말입니다. 그렇기에 의술은 곧 인술(仁術)이라 하는 게 아닐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형주 상실은 촉한에게 무슨 의미였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