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잡설들 08
최근 삼국지 관련 글에서 촉한의 가장 큰 피해가 이릉 전투에서 비롯되었다는 의견들을 보고 꽤 놀랐습니다. 왜냐면 촉한이라는 국가에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준 건 당연히 형주 상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릉에서의 패배로 인해 촉한이 엄청난 피해를 입은 건 물론 사실입니다. 대략 4만으로 추정되는 병력을 잃었고, 무수한 인재들이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했지요. 하지만 형주 상실에 따른 피해는 이릉과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고대 국가에서 영토란 곧 그 나라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땅은 농사를 지어 수확을 거두는 생산 수단이고, 그 땅 위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바치는 세금이며, 그 백성들에게서 비롯되는 병력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그 지역에 대대로 자리잡고 살아온 호족 등 유력자들에서 비롯되는 인재풀이기도 했습니다. 전쟁에 사용하는 목재와 석재부터 군량과 군사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땅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영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219년 당시 촉한(당시에는 아직 정식 국가가 아니었지만 편의상 촉한으로 쓰겠습니다)의 강역은 익주와 형주 일부분이었습니다. 형주 일부분이라 함은 215년의 익양대치 이후로 동오와 영토를 분할한 결과 촉한의 몫으로 정해진 남군, 무릉군, 영릉군 세 군입니다. 몇몇 군들을 잘게 쪼개서 분할하기도 했지만 면적에 변화가 있는 건 아니니 저 세 군으로 보면 됩니다.
손권의 뒤치기와 미방의 배신, 관우의 잘못된 판단과 조조의 격렬한 반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끝에 유비는 결국 형주 3군을 상실했습니다. 당시는 혼란한 시기였기에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손실이 있었는지 기록으로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대략적으로나마 유추해 볼 수는 있죠.
후한서 군국지에 따르면 익주의 인구는 724만 명이었습니다. 물론 전란이 수십 년이나 지속된 삼국시대에는 그보다 훨씬 적었을 겁니다. 하지만 일단 참고용으로는 쓸 수 있겠지요. 한편 형주의 인구는 626만이었고 그중 촉한의 영토에 해당하는 세 군의 인구를 합치면 약 200만입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형주의 상실로 인해 유비는 국가 경제력의 21.6% 가량을 일시에 잃어버린 겁니다. 인구가 곧 생산력인 시대니까요.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형주에서 관우가 거느리고 있던 병력은 수만 단위로 추정됩니다. 손권의 배신에 대비하여 후방에 수비병을 상당히 남겨두었으면서도 조조의 군사들을 밀어붙인 걸로 볼 때, 형주의 병력을 모두 합치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3만은 넘을 걸로 여겨지지요. 그런데 형주를 상실하면서 이 병력이 모두 증발했습니다. 전부 떼죽음을 당한 건 아니고, 일부는 죽고 일부는 손권의 손에 넘어가 버린 거죠.
인적 자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촉한의 주요 인사들 중 형주 출신이 무척이나 많습니다. 제갈량이야 원래는 서주 사람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그 후계자이면서 출사표에도 언급된 장완과 비의는 모두 형주 출신입니다. 곽유지도 그렇지요. 상랑과 상총 역시 형주 사람입니다. 뛰어난 장수로는 황충이 있고요. 이미 죽은 사람이지만 방통도 빼 놓을 수 없지요. 심지어 이엄조차도 본래 형주 사람이었으나 나중에 익주로 들어간 경우입니다.
그러나 형주를 빼앗기면서 그 엄청난 인재풀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미 유비의 휘하에 든 사람들이야 그렇다쳐도 새로운 인재의 발탁은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버린 거죠. 당시 관우의 휘하에서 실무를 맡아보고 있던 많은 인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화처럼 간신히 서쪽으로 도망쳐 온 사례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인물들은 항복한 후 손권의 휘하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일부는 끝까지 맞서 싸우다가 토벌되었습니다.
전략적인 유용성도 있습니다. 형주는 북진하여 중원을 바로 공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래서 제갈량도 이른바 융중대 전략을 제시하면서 익주와 형주에서 동시에 북상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그러나 형주 상실로 인해 촉한의 북벌 루트는 한중으로 한정되게 됩니다. 이후 제갈량은 북벌을 거듭하면서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자. 요약하자면 형주 상실은 촉한에게 있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거대한 손해였습니다. 순수하게 병력의 상실로만 보아도 이릉대전에서의 피해와 엇비슷하지요. 그리고 그 외 다른 영역에서의 피해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래서 이릉 전투는 불가피했습니다. 형주 상실은 유비가 그냥 털고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을 까마득하게 초월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든 복구를 해야 했습니다. 유비가 일 년 반에 걸쳐 공들여 전쟁을 준비한 건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유비의 진정한 잘못은 이릉 전투를 벌인 게 아니었습니다. 이릉에서 패한 게 유비의 일평생 가장 큰 잘못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