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과 나 자신의 이야기 7
이번에는 '기대'에 관련된 이야기를 한 번 정리해 보자.
나에 대한 집안의 기대, 특히 아버지의 기대는 나를 심하게 짓눌렀다. 내가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 때는 그나마 괜찮았다. 그러나 부응할 수 없게 되자 문제가 생겼다. 내게 걸었던 사람들의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고 나는 그 상황을 견디기 어려웠다.
물론 머릿속으로는 생각했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이 잘못은 아니라고. 그러나 이십 년 가까이 쌓여 온 기대의 장벽 속에서, 나도 모르게 기대는 '부응해야만 하는 것'으로 각인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기에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은 '잘못'이 되어 버렸다.
시험 점수가 떨어진 게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왜 나는 무릎을 꿇은 채 시험 성적표를 내밀었을까? 아버지가 혀를 차고 한숨을 쉴 때 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까? 어른들이 서울대 타령을 할 때마다 왜 나는 어색한 웃음으로만 넘겼을 뿐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항변하지 못했을까? 그건 나도 모르게 내가 스스로 잘못했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럴 때마다 기대와 부응에 대한 이분법적인 논리가,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선이고 부응하지 못하면 악이라는 단순무식한 구분이 내 머릿속에 새겨진 게 아니었을까?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지금도 머리로는 알고 있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게 잘못은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내 몸은 여전히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상황 자체를 두려워한다. 그걸 잘못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나는 위축되었다. 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애면글면 안달복달하며 스트레스를 잔뜩 끌어안아야만 했다.
직장에서 승진할 때마다 나는 큰 부담을 느꼈다. 높은 자리에는 당연히 더 많은 기대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젊은 나이에 승진하고, 남들보다 젊은 나이에 부서장이 되자, 그런 부담감은 한층 더 커졌다. 나는 나를 승진시켜 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게 속한 부서 직원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대에 항상 부응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머리로는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불가능한 일을 시도했다.
여기에 두 가지 문제가 더해졌다.
첫 번째 문제는, 내가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대응 방법을 전혀 익히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는 결국 소통 자체에 미숙한 것과도 연결되어 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고개를 숙이고 침묵한 채 그 상황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린다는, 무척이나 수동적이고 회피적인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 외에는 대응 방법을 알지 못했다. 상대를 설득하려 하지도 않았고 내 감정을 설명하려 하지도 않았다. '쓰읍 어쩔 수 없지'는 애당초 선택지에서 지워져 있었다.
그래서 심지어 연애를 할 때조차 나는 상대의 기대, 예컨대 특정한 기념일을 챙긴다거나 혹은 식당을 잘 고른다는 사소한 기대에라도 부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머리가 멈추어버리곤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대처할 방법을 찾기보다는 그 순간만을 모면하고 넘어가려 했다. 그렇게 그냥 넘어가면 다행이다. 하지만 대충 넘어가지 못하게 되면 내가 잘못했다는 인식에 불이 켜진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매우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급발진으로 대처하려 했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자면, 주말에 약속을 잡았는데 다른 일정이 생겨 버리면 일단 어설픈 웃음과 헛소리로 그 상황을 대충 모면하려 한다. 그러다 상대가 기분이 안 좋다 싶으면 갑자기 주말에 못 보니까 내가 지금 당장 너를 보러 가겠다고 외치는 식이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어쩔 수 없지'가 훨씬 나았을 것이다.
두 번째 문제이자 더욱 끔찍하게 나쁜 건, 심지어 그런 기대를 나 스스로 무(無)에서 만들어내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집안의 기대에는 적어도 실체가 있었다. 공부나 서울대 운운은 내가 직접 수십 수백 차례나 들어온 기대였다. 하지만 직장에 들어와 일을 하게 되면서, 그리고 지위가 올라가면서부터 나는 그런 기대들을 나 스스로 만들어내고 거기에 종속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예컨대 나는 내가 부서장이니까 당연히 이런이런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누구도 내게 요구하지 않았던 일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상사나 직원들이 어떠어떠한 기대를 할 것이라고 가정했고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음에도 스스로 확신한 후 거기에 맞춰 대응하려 했다. 시키는 일만 해도 바빠서 허덕일 판국에 내 머릿속으로 만들어 낸 일까지 하려 하니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애당초 실체가 없는 것이었다. 단지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이상적인 상(想)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거기에 대응한다는 건 실상 나 자신을 만족시키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인간이란 으레 자신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는 법이다. 나는 내가 만들어낸 기대에 스스로 부응하지 못했다. 부응할 수 없었다.
결국 나 스스로가 만들어낸 기대는 실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 대응하는 법을 알지 못했기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저 죄책감을 느낄 뿐이었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잘못, 타인을 실망시켰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죄책감이었다.
그 죄책감은 나를 꾸준히 갉아먹었다. 그러다 죄책감이 극한에 다다랐을 때, 나는 내 잘못에 대한 처벌로서 내가 죽어야만 한다고 확신했다. 그게 내가 우울증에 걸린 과정의 일부였다. 신해철이 노래했듯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린'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