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과 나 자신의 이야기 6
한 번 더 스스로에게 강조하자. 이건 누군가의 잘못을 찾기 위한 글이 아니다. 어떤 문제가 생겨난 일을 누군가의 잘못 탓으로 돌리는 것은 너무나 손쉬운 해결책이다. 그러나 그건 옳지 않다. 그래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라는 인간이 구성되어 온 지난 세월을 굳이 이런 식으로 부끄러운 부분까지 들추어보는 건 누군가를 책망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단지 나 스스로가 나 자신을 이해함으로써 우울증의 근원을 찾기 위한 노력이다.
그러니 '소통'에 대해 좀 더 파고들어가 보도록 하자.
소통이란 무엇일까? 국어사전의 정의를 가져오는 건 불필요한 일이다. 말하자면 소통이란 나의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고 동시에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받아들이는 쌍방항적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소통에 매우 서툴렀고, 지금도 서투르다.
나는 내향적인 아이였다. 좋게 말하자면 착하고 조용했고, 나쁘게 말하자면 소극적이고 소심했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성향이 더 강해졌다. 초등학교 때는 그래도 간혹 친구들과 어울려 놀곤 했지만, 중학교때부터는 쉬는 시간에 책을 보거나 개발괴발 만화를 그리는 편이 더 좋았다. 20세기 후반의 체육시간이란 으레 운동장을 몇 바퀴 돈 후에 체육교사가 축구공을 하나 던져주는 걸로 끝나기 일쑤였는데, 그때마다 나는 스탠드에 앉아서 책을 보았다.
나이든 분들은 '책을 본다'는 행위에서 공부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학교에서 허구한 날 책을 보더라도 딱히 무어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실상 내게 있어 독서는 순수하게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행위였다. 수두룩한 다른 취미도 마찬가지였다. 친구와 어울려 노는 것보다는 내 취미를 홀로 즐기는 게 훨씬 더 즐겁고 행복했다.
그런 성장과정을 거쳐서였을까, 아니면 원래 타고난 기질이 그런 것이었을까? 여하튼 결과적으로 나는 꽤나 자기중심적인 인간으로 성장했다. 이기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보다는 본질적으로 타인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나는 타인과의 관계성을 구축하는 데 서투를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럴 필요성도 딱히 느끼지 않았다. 나 자신과, 내가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게 책이었고 게임이었고 만화였고 그 외 잡다한 취미들이었다. 인간 관계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국민학교 시절 친구는 단 하나밖에 기억나지 않고, 중학교 때 친구는 전혀 기억이 안 난다. 그럼에도 고등학교 때는 다행히도 그럭저럭 몇몇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나처럼 게임이나 만화를 좋아해서 취미를 공유하는 집단이었다. 물론 그 안에서도 나는 특히 소통에 미숙한 아이였다.
돌이켜 보면 결국 나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제대로 소통하는 법을 익히지 못한 모양이다. 딱히 익힐 의지도 없었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주제는 나이든 부모님들이 전혀 관심이 없을 것들이었다. 심지어 고등학교쯤 되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쓸데없는 데만 관심을 쓴다고 혼쭐이 나기에 딱 적합했다. 물론 대처 방법은 간단했다. 나는 집에서 아예 입을 다물었다.
반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와 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주제가 문제였다. 공부. 물론 학생의 본분은 공부니까. 그렇지만 내가 할 말이 뭐가 있었겠는가. 시험 성적이 잘 나올 때는 그나마 대화에 웃음기가 감돌았지만, 시험 성적이 안 나올 때는 주로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강렬한 질책이 내 전신을 짓눌렀고 그때마다 나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내가 내향적인 것 자체가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타인에게 큰 관심이 없는 것도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통하는 방법 익히기를 포기한 것은 분명한 실수였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곤란한 상황을 맞이했을 때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를 잘 모른다. 그래서 나는 종종 침묵한다. 마치 이십여년 전, 호통을 치는 아버지 앞에 꿇어앉은 채 침묵하던 과거처럼. 혹은 순간의 겸연쩍인 웃음과 흰소리 몇 마디로 눈앞의 상황만을 모면하려 한다. 그렇게 해서 나는 사람 간 감정의 충돌에서 비롯되는 나 자신의 감정적 피로에서 도피한다. 이건 내가 성인이 된 후 체득한 수법이다.
이 두 가지 방식은 모두 소통이라 할 수 없다. 타인과의 소통을 회피하는 방식일 뿐이다. 물론 도망치는 것도 때로는 도움이 된다. 인간이 어떻게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도망쳤다가도 다음날 또다시 맞닥뜨려야 할 일이라면 도망치는 것은 단지 시간을 조금 번 것 외에 다른 의미가 없다. 마치 내일 내야 할 숙제를 오늘 저녁까지 미뤄두는 것처럼. 언제든지 부모님을 만나고, 집안 사람들을 만나고, 회사 사람들을 만나고, 친구들을 만나야 한다면, 나는 소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