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과 나 : 페르소나 지우기

우울증과 나 자신의 이야기 11

by 글곰

나는 모순덩어리였다. 타인의 기대를 부담스러워하면서도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려고 했다. 애당초 타인에게 큰 관심이 없으면서도 그들의 기대에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결국 나는 타인도 아닌 나 자신에게 휘둘리며 살아온 셈이다.


심리상담 때 상담사가 '주어'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어떤 일을 생각할 때 '나'의 생각을 우선시하라는 것이었다. '남이 내 행동을 어떻게 생각할까'보다 '내가 왜 그걸 하는 걸까'를 먼저 생각하는 식으로. 돌이켜보면 내가 고3 막바지에 수능 공부 열심히를 했던 것도 결국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이후로도 삶의 과정에서 나는 자꾸만 '이렇게 하면 누구누구는 어떻게 생각할까?'를 먼저 생각해 온 것 같다. 그 누구누구는 부모님일 때도 있었고, 친척일 때도 있었고 연인일 때도 있었고, 직장 상사일 때도 있었고, 동료일 때도 있었고, 아내일 때도 있었다. 나보다 타인의 생각을 중요시하고 정작 중요한 나 자신의 감정을 뒷전으로 밀어놓다 보니 이토록 배배 꼬인 나 자신이 되어버린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이건 그야말로 심리학 교과서에 등장할 법한 '페르소나' 그대로가 아닌가. '타인에게 보여지는 나'가 내게는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 나 자신의 마음을 그토록 혹사시켜야 할 정도로?


아마도 아닐 것이다.




월급받은 만큼만 일하면 된다는 게 직장에서의 내 입버릇이었다. 내가 저 말을 자꾸만 되뇐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다. 내가 그렇게 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고 싶어서였기 때문이었다. 직원들에게 사고쳐도 되니까 편하게 일하라고 한 것도 실은 내가 사고를 쳐서 욕을 먹을까 싶어 전전긍긍하는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상사 눈치를 보지 말라고 한 것도 실은 내가 상사의 눈치를 지나치게 보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나의 말들은 내가 실제로 하는 행동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하는 이상형을 투영한 것에 불과했다. 나의 실제 행동은 정반대였다.


직장에서 나는 대체로 죽어라 일하는 워커홀릭에다 완벽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모양이다. 나는 그런 시선들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제는 이해가 간다. 나의 타고난 기질과는 관계 없이, 내가 '그렇게 보이도록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페르소나를 마치 가면처럼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페르소나가 바로, 내가 생각하는 '타인이 기대하는 내 모습'이었다.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나는 그러한 페르소나를 힘겹게 유지했다.


당연하게도 그런 노력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었다. 페르소나와 본래의 나 사이의 간극은 점점 더 커져만 갔고 그 틈을 메꾸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임계점을 넘어버린 순간, 수십 년간 아슬아슬하게 쌓아 왔던 내 감정들이 그대로 폭발하듯 터져나오고 말았다.


이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것 같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낸 페르소나를 이제는 지워버릴 때가 되었다. 이제 좀 더 자기중심적으로 살자.


그렇다고 이기적일 필요까지는 없다. 단지 타인의 기대보다 나 자신의 진짜 마음을 먼저 생각하는 거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고, 조금 더 나 자신을 먼저 생각하자. 타인을 실망시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저 내가 타인을 실망시켰다는 사실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확실치도 않은 타인의 기대를 지레짐작하며 미리 대응하려는 멍청한 짓도 이제는 그만두자.


Memento mori. 죽음을 잊지 말라. 내가 우울증이 극심했을 때 죽음은 내가 손만 내밀면 바로 닿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때의 나를 떠올리는 건 지금도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그 때의 심정만은 잊지 말아야겠다고 지금의 나는 다짐한다. 내가 죽고 나면 다른 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 끔찍했던 죽음의 기억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이제 조금쯤은 더 편하게 마음을 먹어 보자. 다른 그 누구도 아니라 온전히 나 자신만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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