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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Sep 18. 2023

화장실로 가라, 아랫배가 말했다

단편

  애초에 삼겹살을 먹는 게 아니었다. 잔뜩 들이킨 맥주와 기름진 삼겹살이 뱃속에서 마구 뒤섞이자 그것은 필연적으로 하복부를 자극하는 묵직한 느낌을 불러왔다. 화장실로 가라. 아랫배가 말했다. 그러나 나는 아랫배의 조언을 무시했다. 내 맞은편에 앉은 여자 때문이었다. 


  반쯤은 장난삼아 나온 미팅이었지만, 몇 명의 여자들 사이에 앉은 그녀는 마치 고등어무리 사이에서 유연하게 해엄치고 있는 돌고래처럼 돋보였다. 친구들과의 보이지 않는 경쟁을 뚫고 그녀의 맞은편 자리를 차지한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너스레를 떨어 댔고, 그게 비교적 성공적으로 먹혀들어 그녀는 연신 웃음을 터뜨리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내게 보내고 있었다. 아마 그녀의 볼을 붉게 물들일 정도로 적당히 들어간 술 덕도 있겠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분위기는 좋았다. 저녁시간이 되어 자리를 옮긴 삼겹살집에서도 여전히 그녀의 맞은편 자리는 나의 차지였다. 그러나 양쪽에서 친구 놈들이 호시탐탐 나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기에 나는 도저히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그것도 하찮은 똥 따위를 이유로 해서는. 그래서 나는 참았다.


  술과 고기를 얼마나 먹었을까, 문득 그녀가 몸을 앞으로 숙이더니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좀 많이 마신 것 같네.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은데 바래다줄 거지? 그 말의 속뜻을 모를 정도로 나는 우둔하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미팅을 나온 친구와 그녀의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그들의 질투어린 시선을 뒤통수로 받으며 짐짓 그녀를 부축해 술집을 나왔다.


  그게 실수였다. 추운 밖으로 나와 몇 걸음을 옮기자 아랫배가 꾸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시 경고를 보내 왔다. 순간 등에 소름이 돋았다. 그것은 아까보다 좀 더 엄격하고 진중한 경고였다. 그의 말을 무시한다면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이 닥쳐올 것이라는 강렬한 예감이 엄습해 왔다. 나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화장실을 찾아야 한다. 안 되면 아까 나왔던 가게로 다시 돌아가기라도 해야-


  아 어지러워. 그녀가 짐짓 신음소리를 내더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잠깐 어디서 쉬었다 가면 좋겠는데.


  닥쳐라 아랫배야. 나는 근엄한 태도로 일갈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웃음 띤 얼굴을 끄덕여 보였다. 그럼 우리 따뜻한 곳에서 잠깐 있다 가자. 마침 골목 저편에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모텔 간판이 보였다. 그녀는 취한 척이라도 하는 것인지 은근슬쩍 내게 몸무게를 실어 기대 왔다. 그녀의 몸이 내게 안겨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동시에 아랫배에 압박이 가해지는 바람에 나는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물러갔던 나쁜 예감이 되돌아와 내게 수상쩍은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나의 발걸음은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킥 웃었다. 아이 참. 왜 그렇게 급해? 하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모텔을 향해 걷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발바닥에서 올라오는 진동이 나의 대장과 직장을 꾸준히 두드리고 있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 카운터 앞에 도달할 때쯤 나의 항문은 이미 적색경보, 데프콘 2를 발령한 상태였다. 가만히 서 있을 수 없어서 나는 연신 다리를 꼬아대며 떨리는 손으로 요금을 지불했다. 남의 속사정도 모르는 그녀는 그런 나를 보며 픽 웃었다. 왜 이렇게 긴장했어? 설마 처음? 그녀의 손가락이 내 옆구리를 쿡 찌르는 순간 나는 차마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항문이 열리고 기름진 거름들이 탈출하기 직전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간신히 다시 입구를 닫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건 미봉책일 뿐이었다. 이미 대장을 지나 직장까지 다다른 적의 군세는 집요하고 강렬했다. 끊임없이 굴러 내리는 바위를 다시 굴려 올리는 시시포스처럼, 나는 매 초마다 밀어닥치는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쉬지 않고 싸워야만 했다. 그러나 적의 공격은 횟수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강렬해졌고 나의 최후방어선은 이미 함락되기 직전이었다. 


  그 때 젊은 아르바이트생이 열쇠를 건네주었다. 801호였다. 8층까지 올라가라고? 내 일그러진 표정을 보았는지 녀석이 젠체하며 입을 열었다. 특별히 인테리어가 깔끔하게 된 방으로 드렸습니다. 아니 그딴 거 필요 없다고! 그러나 말싸움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열쇠를 낚아챘다. 하늘에 감사하게도 다행히 엘리베이터는 1층에 멈춰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나는 3층에서 5층으로 건너뛰어 버리는 대한민국 건축물의 관행에 진심으로 축복을 빌었다. 801호는 엘리베이터 바로 옆에 있었기에 나는 단 세 걸음 만에 문 앞에 설 수 있었다. 정신적인 안도감이 몰려오면서 끊임없이 항문을 두드리던 적군의 기세도 잠시 수그러진 듯해, 문을 열기 전에 나는 그녀에게 눈을 찡긋해 보이는 여유마저 가질 수 있었다. 문을 열고 열쇠를 꽂자 어두운 방에 조명이 들어왔다.


  욕실은 투명한 유리벽으로 되어 있었다. 심지어 변기가 있는 곳까지.


  특별한 인테리어 운운하던 아르바이트생의 때려죽이고 싶은 얼굴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걸 어쩌지? 그대로 화장실에 들어갈까? 그리고 바지를 벗고 똥을 싼다고? 유리 너머로 그녀의 그윽한 시선을 마주하면서? 거대한 소리와, 그리고 짙은 향기와 함께? 삼겹살에 소주를 섞고 일련의 생물학적 소화과정을 거친 결과물의 처참한 향기를 상상하는 순간 나는 헛구역질을 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그나마 최선으로 보이는 계획을 짰다. 일단 먼저 씻으라고 하자. 그리고 씻는 사이에 1층으로 내려가서 직원 화장실에 가는 거다. 거기서 일을 처리하고 다시 올라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거지. 나는 잽싸게 계획의 얼개를 검토해 보았다. 좋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억지웃음을 짜내며 말했다. 먼저 씻을래? 그녀는 내게 살짝 눈웃음을 치더니 말했다. 우리 같이 씻을까?


  먼저 씻으라고! 누군가 내 목을 조르기라도 한 것 같은 신음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녀는 의아한 듯 나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유리문을 열고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잽싸게 몸을 돌렸다. 잠시 주춤했던 적들이 이제는 엄청난 화력을 동원해 강렬한 폭격을 개시하고 있었다. 어서 1층으로 가야-


  툭.


  돌아서는 순간 발이 문지방에 걸렸다. 상체가 회전하며 몸이 균형을 잃었다. 손을 휘저었지만 헛되이 허공만을 가를 뿐이었다. 한쪽 발이 공중으로 뜨며 몸이 고꾸라졌다. 위아래가 뒤집히더니 모텔 바닥이 속절없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충돌. 강한 고통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내달리며, 그때껏 적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던 모르도르의 검은 문이 마침내 열리고야 말았다. 거칠 것이 없어진 적들이 기세등등하게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뜨겁고 축축한 것이 끊임없이 분출해 엉덩이와 허벅지를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엎드린 채 가장 효율적인 자살 방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내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나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고요한 모텔방에 수상쩍은 냄새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그녀가 내뱉은 단 한 마디였다.


  미친새끼.


  나는 진심으로 미쳐버렸으면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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