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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도키아에서 시간 낭비를

사진 한 장 짜리 튀르키예 여행 (첫날)

by 글곰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아침 아홉 시 반이었다. 집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공항철도를 타고, 이스탄불행 비행기를 열한 시간 반 동안 타고, 다시 카이세리행 비행기를 갈아타고, 또다시 차를 타고 마침내 괴레메 마을의 숙소에 도착한 참이었다. 집을 떠난 지 스물한 시간이 지났고 나는 충분할 만큼 지쳐 있었다. 하지만 아침 아홉 시 반이었고 오늘 하루는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움직였다.


그렇다고 딱히 뭘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나의 계획은 첫날 내내 알뜰살뜰히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었다. 투어는 다음날부터 돌아도 충분했다. 그래서 나는 마을을 한바퀴 돌았다.


솔직한 감상은 한국의 적당히 유명한 관광지에 온 느낌이었다. 관광객을 상대하는 가게들이 개천을 따라 일렬로 늘어선 모습은 익숙했다. 그리고 마을은 조그만했다. 기껏해야 이삼십 분이면 중요한 곳을 모두 둘러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커피를 한 잔 마시기로 했고,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는 주인장의 말에 혼자 발끈해서(그는 정확하게 '아아'라고 발음했다) 튀르키예식 커피를 주문했다. 기대한 만큼 쓰고 바라던 만큼 향기로운 커피여서 나는 만족했다.


조금 걷고 싶어서 숙소에서 받은 지도를 펴들었다. 야외 박물관이 눈에 들어왔다. 레드투어 방문지에 포함되어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별로 할 일이 없었기에 나는 그곳으로 걸어갔다. 도로 가장자리를 따라 걷는 얼마 안 되는 시간 사이에 멋진 바위들을 잔뜩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기암괴석이라는 네 글자가 딱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야외 박물관에 위치한 여러 공간들을 둘러본 후 나는 적당히 시간을 맞춰서 마을로 돌아왔다. 점심으로 항아리 케밥을 먹고, 언제나 그러하듯 기대는 실망을 불러오기 마련이라는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더군다나 카파도키아의 물가는 관광객의 눈탱이를 사정없이 후려치는 수준이었다. 적당한 메뉴 하나에 이삼 만원씩 나가기 일쑤였다. 커피는 한국의 스타벅스가 더 쌀 지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먹고 마셨다. 그러고 나서야 내가 24시간 사이에 기내식 세 차례를 포함해서 도합 여섯 끼니를 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잠시나마 죽고 싶어졌다.


그래서 오후에는 더 이상 먹지 않고 숙소에서 빈둥거리다 저녁시간에 맞춰서 다시 나왔다. 전망대에 올라가서 천원쯤 하는 입장료보다 훨씬 가치 있는 풍경을 구경한 후, 미리 알아두었던 가게로 가서 와인 한 잔에다 식사 겸 안주로 양꼬치 케밥을 주문했다. 인심 좋은 주인은 잔에다가 찰랑거릴 정도로 와인을 가득 따라주었다. 나는 와인을 홀짝이며 나의 비싸디비싼 시간 낭비를 되새겨 보았다. 그러자 기분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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