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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Sep 28. 2019

형주 공방전 : 불멸로 남은 이름 (6)

삼국지 속 전쟁들 09

  손권은 관우를 목 벤 후 그 수급을 조조에게 보냅니다. 조조는 손권을 표기장군(驃騎將軍) 형주목(荊州牧)으로 임명하여 치하합니다. 그리고 제후의 예로서 관우를 장사 지내지요. 자신이 진심으로 휘하에 두고 싶어 했던 동시에 일평생 자신을 가장 두렵게 만들었던 장수에 대한 예우였습니다. 


  이후 관우가 영유하던 형주의 모든 영토와 물자는 모조리 손권에게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손권은 마침내 형북 일대를 제외한 형주를 차지하게 되었지요. 그러나 그 일등공신이었던 여몽은 병으로 인해 결국 해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해버립니다. 그러다 보니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의 원혼 때문에 죽었다는 식으로 각색되기도 했습니다. 


  관우의 죽음은 유비에게 있어 크나큰 충격이었습니다. 장비까지 포함하여 세 사람의 관계는 군신(君臣)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형제에 가까웠죠. 그만큼 신뢰했던 관우의 죽음,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형주의 상실은 그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타격이었습니다. 숙적 조조를 타도하고 마침내 한중을 차지한 후 스스로 한중왕에 등극했던 유비입니다. 그야말로 인생의 절정기라 할 수 있는 때에서 불과 반년도 지나기 전에 그는 엄청난 좌절을 맛보게 된 셈입니다. 


   형주를 잃었다는 건 영토와 백성과 병력과 물자의 크나큰 상실을 뜻했습니다. 동시에 제갈량이 출사하며 제시했던 이른바 융중대 전략, 천하삼분의 계책을 근본적으로 깨뜨려 버린 손실이기도 했습니다. 제갈량은 일단 조조와 유비와 손권이 솥의 세 발처럼 할거한 후, 북쪽에 이변이 일어나기를 노려 한중과 형주에서 동시에 출진해 위나라를 공격하면 마침내 천하를 도모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촉은 이때 상실한 형주를 끝내 수복하지 못했고, 이후 제갈량의 북벌은 형주에서 북상하는 경로를 배제한 채 오로지 한중을 통해서만 이루어지게 됩니다. 


  공교롭게도 제갈량이 노렸던 바로 천재일우의 기회가 불과 한 달 후에 생겨납니다. 220년 1월, 위왕 조조가 세상을 떠난 것이지요. 그러나 죽기 직전에 관우의 공격을 막아냈던 덕분에 후계자 조비에게로의 승계는 별문제 없이 마무리될 수 있었습니다. 관우를 잃고 형주를 상실한 유비로서는 조조를 공격할 여력이 전혀 없었지요. 만약 조조가 죽은 시점에서도 관우가 형주에 도사리고 있었다면 과연 천하의 향방은 어디로 향했을까요. 절대적인 권력자가 세상을 떠난 후 외부에서 닥쳐온 강렬한 위협을 맞닥뜨리게 된 위나라는 어찌 되었을까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수천 년 전 그리스 시대에서부터 사람들은 언제나 영웅담을 갈구해 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희극을 바랐음에도 결국 시대의 간극을 뛰어넘어 살아남는 것은 오히려 비극이었습니다. 완전무결한 영웅의 성공담보다도, 결점 있는 인간이 분투 끝에 결국 운명에 굴복하고 마는 슬픈 이야기에 오히려 사람들은 빠져들었습니다. 오이디푸스는 결국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되었습니다. 헤라클레스와 지크프리트는 둘 다 적에게 속아 넘어간 아내 때문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오딘은 신들의 종말을 막고자 동분서주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그 자신도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햄릿은 분노와 광기에 가득 찬 삶의 끝에서 원수와 함께 쓰러졌습니다. 메시아 예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믿었던 제자의 배신과 십자가형이었지요. 


  하지만 그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들의 이야기는 살아남아 역사를 관통하며 지금껏 전승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관우. 평생에 걸쳐 고난을 겪은 끝에 마침내 천하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믿었던 아군과 동맹에게 배신당해 허망하게 죽고 만 관우의 이름은 오히려 이천 년이 넘도록 생생히 살아남았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에 대한 추앙은 높아져 왕(王)에서 황제(帝)가 되었고 급기야 신으로 모셔지기까지 했지요. 그것은 단지 충(忠)을 강요하고자 하는 정치적 프로파간다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관우는 애당초 완전무결한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출생 연도와 출신성분부터가 불명확했고, 전장에서는 종종 패했으며, 적에게 항복하기도 했었고, 협잡에 가까운 속임수도 썼습니다. 남의 아내를 탐한 적도 있었으며 주위 사람들과는 화목하지 못했고 오만한 성품으로 인해 불필요한 문제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결점을 뛰어넘을 영웅의 자질을 그는 지니고 있었습니다. 주군 유비에 대한 그 끝 모를 의리 말이지요. 이미 손아귀에 넣은 부귀영화를 마치 아무것도 아닌 양 내던지고 적수공권인 유비에게 돌아가는 관우의 모습은 실로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유비가 모든 인재와 병력을 뽑아간 이후에도 얼마 안 되는 남은 병력만으로 죽을힘을 다해 형주를 지켜내는 모습은 눈물겹기까지 하지요. 그는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인간이었습니다. 자신이 아니라 타인의 신념을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자였습니다. 


  관우는 결코 백전불패의 명장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같은 소시민들이 이상(理想)으로 생각한 삶의 태도를 그는 현실세계에서 끝까지 지켜냈습니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끝내 굴복하지는 않았습니다. 강자에게는 도도했지만 약자에게는 너그러웠습니다. 하여 그의 비극적인 삶이 마침내 종막을 고하는 순간, 역설적이게도 그로 인해 관우는 영원불멸의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이번 글을 쓴 연유입니다. 





  관우의 죽음 이후로도 역사의 수레바퀴는 끊임없이 굴러가고 있었습니다.


  조조가 죽자 슬며시 욕심이 생긴 손권은 양양과 번성까지 차지하고자 합니다. 겁을 먹은 조비는 사마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양양과 번성을 불태운 후 조인을 완으로 퇴각시키지요. 관우가 그토록 손에 넣고 싶어 했던 양번은 그렇게 불탄 폐허가 되어 손권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조비가 다시 양번을 공격했고, 손권은 한심할 정도로 무력하게 양번을 내주고 맙니다. 그곳에는 새로운 성이 축조되지요. 이후 사마씨가 천하를 통일할 때까지 결국 양양과 번은 다시는 손권의 소유가 되지 못했습니다. 


  관우를 배신하고 손권에게 항복한 미방은 평생 업신여김을 받으면서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살아갔습니다. 사인은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어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가짜 항복했다는 이유로 제거된 것인지, 아니면 오래도록 편안하게 천수를 누렸는지. 한편 유봉과 드잡이 하다 관우를 구원하지 못해 결국 죽도록 방치한 맹달은 유비가 죄를 물을까 겁내어 위나라로 귀순해 버립니다. 그리고 위나라의 병력을 얻어 오히려 상용을 공격하죠. 공교롭게도 그 병력을 지휘한 사람은 작년에 양양에서 관우를 격파했던 서황이었습니다. 


  그렇게 결국 형주에 이어 상용 일대마저 위나라로 넘어가고 맙니다. 유비에게는 엎친 데 덮친 격이었죠.  패하여 성도로 돌아온 유봉, 평생 아껴마지않았던 양아들의 죄를 물어 유비는 그를 처형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제갈량이 그렇게 하라고 조언했다 하지요. 이 또한 관우의 죽음이 불러온 여파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관우의 죽음으로부터 일 년 반이 지난 후, 유비는 뭇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복수전을 감행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일어나지 않았어야 했던 전쟁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전쟁이었습니다. 문제는 전쟁 자체가 아니라 그 결과였습니다. 


  그 전쟁은, 유비 일생에 걸쳐 가장 큰 패배로 끝났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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