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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Nov 13. 2019

이릉 전투 : 파국의 절정(1)

삼국지 속 전쟁들 10

  219년 12월. 형주 공방전은 관우의 죽음으로 종결되었습니다. 유비는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신하이자 마치 형제와도 같았던 가까운 인물을 잃었지요. 하지만 그는 슬퍼하는 대신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극에 달한 분노를 강동의 쥐새끼에게 쏟아부었습니다. 유비는 손권을 정벌하겠다고 선언합니다. 


   혹자는 유비의 이러한 결정에서 솔직한 감정을 정치적 이해타산보다 앞세우는 인간적인 면모를 봅니다. 저도 그런 해석에 일정 부분은 동의합니다. 유비는 본래 타고나기를 그런 인물이었고, 그것이 바로 유비의 한계인 동시에 매력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 해서 단지 사사로운 복수심 때문에 유비가 손권을 공격한 것이라고 해석하면 곤란합니다. 동오 정벌에는 몹시 현실적인 이유 또한 있었습니다.


   한중 전투가 유비의 승리로 끝나고 유비가 스스로 한중왕에 등극한 시점에서, 촉한의 국력은 동오와 비등하거나 혹은 조금 더 앞서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미처 반년도 지나기 전에 유비는 형주를 상실하며 순식간에 손권보다 열세에 처하게 되었지요. 형주의 상실은 곧 유비의 영토와 물자, 인재와 병력 등이 일순간에 대량으로 증발해 버린 막대한 피해를 의미했습니다. 유비는 진심으로 형주를 되찾고 싶었을 겁니다. 


   게다가 유비는 유장처럼 한 개 주(州)에서 거들먹거리며 안주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천하를 원했지요. 그렇기에 형주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과거 제갈량이 유비에게 출사했을 때 이른바 융중대 전략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익주와 형주를 겸병하면서 때를 노리다가 양쪽에서 동시에 출병하여 중원을 공격한다는 대전략이었지요. 그런데 익주에서 한중을 거쳐 장안 방면으로 나아가는 길은 몹시 험하여 병력의 이동이 어렵고 물자의 운반도 곤란합니다. 반면 219년에 관우가 보여주었듯이, 형주의 강릉 방면에서 북상하여 양양을 지나면 위나라의 수도인 허도가 곧 눈앞에 보입니다. 북벌을 위한 길목을 확보한다는 의미에서도 형주는 몹시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손권은 한때 동맹이었으나 이제는 자신을 배신한 적이었습니다. 형주를 빼앗은 후에도 익주 남부 일대(남중)의 반 유비파 호족인 옹개를 지원하고 형주에 있던 유장을 허수아비 익주목으로 임명하는 등 유비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손권을 그냥 놓아둘 수 있을까요? 생각해 봅시다. 일본이 갑자기 한반도를 침공해서 경상북도와 경상남도 일대를 점령했다고 가정해 보죠. 그 상황에서 대한민국이 오히려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는 게 상상이나 가십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이건 유비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그 부하들이나 지역의 호족들도 납득할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유비는 자의로든 타의로든 절대 형주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전쟁은 불가피했습니다. 

 



   하지만 유비는 극도로 분노했으면서도 동시에 무척이나 침착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연의를 보면 관우의 죽음에 분노한 유비가 무작정 동쪽으로 돌진한 것처럼 묘사되지요. 하지만 관우가 죽고 형주를 손권에게 빼앗긴 건 219년 12월이고 유비가 동쪽으로 친정(親征)을 떠난 건 일 년 반이나 지난 221년 7월의 일입니다. 전쟁을 일으키기까지 일 년 반이나 되는 시간이 있었지요.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220년 정월에 유비 평생의 호적수였던 조조가 죽었습니다. 아마도 형주를 빼앗기지 않았더라면 유비는 이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고 천하통일을 위한 전쟁을 시작했을 겁니다. 하지만 관우가 죽고 형주를 상실한 유비는 곧바로 그런 대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었어요. 손권은 그럴 만한 의지나 능력이 없었고요. 조비는 너무나도 손쉽게 왕위를 계승합니다. 


   하지만 손권에게 원대한 포부는 없더라도 영토에 대한 욕심은 있었습니다. 그는 조조의 죽음으로 위나라가 혼란에 빠진 사이에 양양을 슬며시 탐냅니다. 4월에 병력을 보내 봤죠. 본격적인 전쟁이라기보다는 찔러보기에 가까웠습니다. 이런 움직임에 대한 조비의 반응은 지나칠 정도로 황급했습니다. 조인에게 명하여 양양성과 번성을 불태우고 완으로 도망치도록 하였으니까요. 별생각 없이 양양으로 갔던 손권의 병력은 텅 비고 불타버린 성이나마 차지했습니다. 불과 한 해 전에 명장 관우와 조인이 운명을 건 치열한 결전을 벌이던 그 두 성은 이렇게 무척이나 허망하게 손권에게로 넘어갔습니다. 


   몇 달 후, 조비는 자신이 겁먹었던 게 부끄러웠던지 조인에게 양양과 번을 탈환하라 명령합니다. 조인은 손권의 부하 장수를 어린이 손목 비틀 듯 박살내고는 다시 두 성을 되찾았습니다. 이후 삼국시대가 끝날 때까지 이곳은 북쪽 나라의 차지가 됩니다. 


   같은 해 10월에 조비는 헌제로부터 황위를 선양받습니다. 이로서 한나라는 마침내 멸망했습니다.


   게다가 헌제가 조비에게 살해당했다는 식의 소문까지 돌았습니다. 당시 헌제는 황위를 선양한 후에도 구석진 곳에서나마 그럭저럭 먹고살고 있었는데 말이지요. 단지 뜬소문이 와전된 것인지 아니면 유비 세력의 정치적 속임수였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유비는 헌제의 죽음을 기정 사실화하고 제사를 지낸 후 시호까지 올립니다. 그로부터 몇 달 되지 않아 유비는 한나라의 계승을 천명하며 스스로 황위에 오르지요. 그래서 유비가 세운 나라의 이름은 촉(蜀)이나 촉한(蜀漢)이 아니라 그냥 한(漢)입니다. 촉이나 촉한이라는 이름은 헷갈리지 않기 위해 후대의 역사가들이 임의로 붙인 이름이지요. 


   221년 4월. 유비는 황위에 오른 후 제갈량을 승상(丞相)으로 삼고 허정을 사도(司徒)로 올리며, 마초와 장비를 각기 표기장군(驃騎將軍)과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합니다. 여기서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보는 부분이 대장군(大將軍)을 임명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왜냐면 유비는 한의 계승을 천명했던 만큼 한나라의 제도를 거의 그대로 답습했는데, 그 제도에 따르면 군부의 서열은 가장 위에 대장군이 있고 그다음에 표기장군-거기장군 순서거든요. 그래서 저는 유비가 마음속으로 죽은 관우를 대장군으로 여겼기에 그 자리를 공석으로 놓아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근거는 없습니다. 대장군은 본래 상설직이 아니기도 했고요. 하지만 어쩐지 그랬을 것만 같아요. 


   여기까지가 관우가 죽은 지 일 년 하고도 다시 한 해의 절반이 지나는 사이에 있었던 사건들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유비의 손권에 대한 복수심과 적개심은 전혀 사그라들지 않고 있었습니다. 손권 토벌을 위한 전쟁 준비는 신중하게, 그러나 동시에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전쟁의 막이 오를 때가 다가오는 긴박한 때였습니다. 


   221년 6월. 성도의 황제 유비에게 비보가 날아듭니다. 거기장군 장비가 죽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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