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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Sep 28. 2019

형주 공방전 : 불멸로 남은 이름 (5)

삼국지 속 전쟁들 08

 조인과 만총이 번성에서 포위당하고 우금의 7군이 수몰된 시점에서, 서황은 급하게 끌어 모은 신병을 이끌고 완에서 남하해야 할 정도로 다급했습니다. 218년 8월의 일입니다.


  서황은 처음에는 관우의 기세를 감당해내지 못하고 양릉피라는 곳으로 옮겨 주둔합니다. 앞뒤 정황을 살펴보면 관우와 한번 교전했다가 패한 후 이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번성이 함락되지 않고 시간을 끌어 주는 동안 차츰 조조의 진정한 힘이 발휘되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10월이 되자 손권에게 보낸 밀사에 대한 회신이 돌아왔습니다. 손권이 스스로를 신하로 자처하면서 관우를 공격할 것이라고 알려 왔지요. 조조에게는 반격을 꾀할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조조가 관우를 막기 위해 투입한 병력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낙양까지 돌아온 조조는 우선 서상과 여건 등의 장수를 서황에게 보냅니다. 이들은 다른 데서 이름을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일단 급하게 그러모은 병력을 인솔한 부장(副將) 격으로 보입니다.(여건은 조조가 초창기에 등용한 여건과 한자가 다른 동명이인입니다.) 하지만 역시 그들만으로는 관우를 상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병사가 더 모이기를 기다려 한꺼번에 진격하라고 당부하지요.  


  이후 은서, 주개 등이 이끄는 12영(營)을 추가로 파견합니다. 영(營)이란 군사들이 주둔하는 진영이나 혹은 그 진영에 주둔하는 병력을 일컫는 글자입니다. 하지만 병력의 규모를 표시할 때는 2천 명에 해당되지요. 그러니 12영은 24,000명인 셈입니다. 


  물론 그걸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조조에게는 새로 생겨난 여력이 있었습니다. 손권이 귀부해 온 이상 원래는 손권을 견제하는 용도로 배치했던 병력을 마음껏 끌어다 쓸 수 있었죠. 본래 거소라는 곳에 주둔한 군사들이 손권을 방비하기 위한 주력이었고 하후돈과 장료 등이 이들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조조는 그들마저 모두 불러 모읍니다. 또 연주자사 배잠과 예주자사 여공도 호출합니다. 즉 두 개 주(州)의 병력을 총동원한 거죠. 이들 역시 군사를 이끌고 당도합니다. 


  그리고도 조조에게는 쓸 수 있는 수단이 하나 더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이 이끄는 직속 병력이었습니다.


  조조는 다시 한번 직접 친정(親征)에 나섭니다. 마피에 주둔하여 서황의 뒤를 받칠 채비를 하였습니다. 하후돈과 장료, 배잠과 여공 등도 모두 그곳으로 모여들었지요. 바야흐로 조조의 전군이 총동원되다시피 하여 관우 한 사람을 공격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219년 10월. 마침내 일대 격전이 벌어질 때가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전투 직전에 번성에서 관우의 진영을 향해 화살 한 대가 날아들었습니다. 편지가 매달려 있었지요. 그걸 읽어본 관우는 경악합니다. 바로 손권이 조조에게 바친 편지였거든요. 손권이 스스로 조조에게 귀부하며 관우의 후방을 공격하여 공을 세우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편지를 보고도 관우는 마음을 쉽게 정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도 이게 조조의 속임수일지 진짜일지를 알 수 없었죠. 만일 속임수라면 그때까지 들인 공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양번을 함락시킬 수 있다는 희망도 있었겠죠. 설령 손권이 정말로 배신하더라도 자신이 직접 보수한 강릉성이 쉽게 함락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 냉큼 돌아가겠다고 할 수 없는 게 어쩌면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장병들은 동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조가 노린 것도 바로 그 점이었지요. 그리고 마침내 서황이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서황은 본래 신중한 성품으로, 이기지 못할 것 같으면 애당초 싸움을 피하는 성향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먼저 공격을 시도한 건 병력의 양이나 질에서 이제는 관우보다 우세하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서상과 여건, 은서와 주개 등 장수와 병력을 충분히 지원받았으니까요. 반면 관우가 병력이 열세인 상황에서 그토록 바라던 상용의 지원군은 결국 아무런 소식도 없었습니다.  


  이때 관우는 번성 북쪽의 언성이라는 곳에 병력을 두었는데 서황이 접근해 오자 성을 불태우고 물러나 위두와 사총이라는 두 곳에 각기 병력을 나누어 배치합니다. 관우는 참호를 깊이 파고 녹각을 열 겹이나 둘러서 튼튼한 방어진을 구축해 둔 상태였지요. 서황은 정면으로 들이받는 대신 계책을 씁니다. 위두를 공격하는 것처럼 꾸민 후 몰래 사총을 공격한 거죠. 관우는 사총이 경각에 달렸다는 소식을 듣고 5천 명을 이끌고 직접 출진해 맞서지만 서황과 교전 끝에 크게 패하고 맙니다. 병사들이 강물에 무수히 빠져 죽고, 관우는 번성의 포위를 풀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인과 만총은 마침내 기나긴 포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요. 


서황의 승리와 양번 포위망의 붕괴


  관우의 튼튼했던 양번 포위망은 이렇게 서황의 활약으로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그 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던지, 조조는 그의 전공이 손자(孫子)로 불리는 손무나 춘추시대 제나라의 명장 사마양저마저 뛰어넘는다고 극찬합니다. 또한 서황이 개선하자 직접 성 밖으로 나가 그를 맞이할 정도였지요. 본래 서황은 다른 사람과 사귀는 걸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와 교우를 맺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가 바로 관우였습니다. 그랬던 서황이 관우를 격파하는 데 결정적인 공훈을 세우게 되었으니 운명이란 참으로 얄궂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패했을망정 관우가 아주 다급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병력은 조조가 많았지만 수군이 없었기에 한수(면수)의 수로(水路)는 여전히 관우가 장악하고 있었고, 양양성 역시 포위한 상황이었습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이 시점에서라도 양양의 포위를 풀고 한수를 따라 강릉으로 퇴각했다면 이 전투는 무승부로 끝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관우에게 현실은 그보다 훨씬 더 냉혹했습니다. 윤 10월. 쥐새끼처럼 눈치만 보고 있던 손권이 마침내 움직였습니다. 




  관우를 상대하기 위해 조조가 모든 장수와 병력을 끌어 모은 것처럼, 손권 또한 본인이 동원 가능한 최대한의 힘을 형주에 투입했습니다. 여몽과 육손이 선봉이 되었는데 각기 주연과 반장, 이이와 사정을 부장으로 삼았습니다. 장흠과 손환이 각자 수군과 육군을 이끌고 그들을 뒷받침했죠. 손권 자신도 직접 중군을 맡아 출격했고, 손교는 후속부대를 담당하며 보급에 전념했습니다. 감녕 또한 이때 동원되었던 걸로 보입니다만 또 다른 기록으로는 벌써 사망했다고도 하여 명확하지 않습니다. 


  여몽은 몰래 장강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병사들에게 상인의 옷차림을 하게 한 후 백성들에게 노를 젓게 하여 상선(商船)으로 위장한 상태였죠. 관우는 강변을 따라 무수한 둔영을 세워 방비해 두었지만 상인으로 꾸민 적의 기습을 막아내지 못합니다. 그렇게 여몽은 먼저 장강을 장악한 후 마침내 공안에 이르렀죠. 공안을 지키던 장군 사인은 냉큼 항복합니다. 다만 배송지 주에 인용된 오서에 따르면, 우번은 사인이 거짓으로 항복했다고 여겼던 모양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사인을 무작정 배신자로만 치부할 수 없을 일말의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 


  반면 미방은 그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습니다. 진작부터 손권과 내통하고 있었던 그는 여몽의 군사들이 이르자 성 밖으로 나와 고기와 술까지 대접해 가며 항복하고 맙니다. 관우의 거점이자 거대한 군사기지였던 강릉성은, 적벽대전의 대패 이후로도 조인이 유-손 연합군을 상대로 거의 1년이나 버텨냈었던 천혜의 요새 강릉성은 단지 미방 한 사람이 관우를 배신한 까닭으로 너무나도 무력하게 동오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여몽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공안과 강릉을 함락시키는 동안 육손은 곧장 서쪽으로 진격하여 의도군을 점거한 후 익주에서 형주로 나오는 길목을 차단합니다. 이후 다시 주변에 있는 관우의 부하 첨안과 진봉, 등보와 곽목 등을 토벌하지요. 그야말로 속전속결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관우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습니다. 근거지가 송두리째 날아간 데다 믿었던 부하들이 죄다 배신한 상황. 관우는 할 수 없이 포위를 풀고 강릉으로 돌아갑니다. 불과 한두 달 전까지 천하를 진동시키던 위세를 생각하면 실로 당혹스러우리만큼 급격한 몰락이었지요. 위나라 군사들이 그 뒤를 쫓으려 했지만 조조는 저지했습니다. 관우와 손권이 한판 붙는 걸 보며 어부지리를 얻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관우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강릉이 일단 적의 손에 넘어간 이상, 근거지를 잃은 자신이 다시 형주를 탈환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여몽은 심리전까지 걸어옵니다. 강릉과 공안을 제압한 그는 관우와 그 부하들의 가족들을 해치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노인과 병약자들을 지원하고, 또 백성의 물건을 빼앗는 병사들을 처벌하여 빠르게 민심을 얻습니다. 그리고 관우가 사자를 보내올 때마다 관우의 부하들에게 그런 소식을 전하도록 하지요. 포로로 붙잡힌 가족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병사들은 싸울 마음을 잃고 맙니다. 게다가 손권의 본대까지 형주에 당도하자 관우로서는 더 이상 대적할 엄두를 낼 수 없었죠. 


익주로 도망치려 시도한 관우의 퇴각로


  11월. 관우는 강릉으로 향하던 도중에 방향을 틀어 맥성으로 갑니다. 이미 형주를 장악한 손권은 손쉽게 그를 포위했죠. 관우는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분투합니다. 거짓으로 항복을 청한 후 밤중에 성을 빠져나와 도망치죠. 그러나 그마저도 이미 주연과 반장이 도주로를 차단한 후였습니다. 도중에 병사들이 대부분 흩어지고 관우의 주변에는 고작 십여 명에 불과한 부하들, 그리고 장남 관평과 도독 조루만이 남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우는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했습니다. 이천 년 전에 살았던 한 인물의 마음을 제가 어찌 예단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관우에게 있어 그 남다른 자부심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주군인 유비의 존재였을 겁니다. 그는 일평생을 유비를 위해 바쳤지요. 그건 충성의 범주를 넘어선, 실로 순수하기까지 한 의(義)였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유비에게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관우는 그 어떤 굴욕과 비참함도 참아낼 수 있었습니다. 적에게 항복했다는 오명도 상관없었습니다. 거짓 항복 따위의 협잡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관우라는 사내에게 유비는 삶의 의미이자 버팀목이었으니까요. 그랬기에 관우는 여전히 서쪽으로 도망쳤습니다. 오로지 유비를 향해. 오직 유비를 위해. 


  하지만 그가 도망칠 곳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익주에서 형주로 이어지는 길목을 육손이 차단한 이상 그가 향할 수 있는 곳은 상용뿐이었지요. 상용으로 접어드는 길목인 임저에서 그는 반장의 군사들과 조우합니다. 유비에게 가기 위해 최후까지 싸우던 관우는 결국 반장의 사마(司馬)인 마충이라는 무명 장수에게 사로잡히고 맙니다. 그걸로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219년 12월. 한때 만인지적(萬人之敵)이라 칭해졌던 장수는 너무나도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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