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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Sep 28. 2019

형주 공방전 : 불멸로 남은 이름 (4)

삼국지 속 전쟁들 07

  자. 이번 편에서는 잠시 이야기 전개를 멈추고 관우를 둘러싼 환경에 대해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금의 칠군을 수몰시키고 양번을 포위할 때만 해도 관우의 기세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단숨에 천하를 평정할 것만 같았지요. 그러나 동시에 그 이면에는 갖가지 문제점들, 말하자면 불안요소가 숨어 있었습니다. 대략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1) 손권과 여몽의 속임수

   2) 미방과 사인의 배신

   3) 맹달과 유봉의 한심한 짓

   4) 유비의 성도 귀환

   5) 3만 명의 포로

   6) 조조의 전력 동원


   참 많기도 하네요. 어디 한 번 하나하나 살펴볼까요? 

 


 

관우를 둘러싼 적들

 

   [1. 손권과 여몽의 속임수]


  여몽은 일찍이 형주를 겸병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주유가 유비를 이용하려 했었고, 노숙이 유비와 협력하려 했던 반면, 여몽은 유비를 병합하려 했었지요. 손권도 주유와 노숙이 연달아 죽은 후에는 점차 여몽의 의견에 마음이 기울게 됩니다. 물론 관우 또한 그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관우는 양번을 공격하면서도 후방에 병력을 다수 남겼는데 그건 여몽을 대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몽은 관우가 양번을 공격하러 출격하자 지금이야말로 형주를 차지할 적기라고 판단합니다. 그렇기에 손권에게 상소를 올리죠.

 “관우가 후방에 수비병을 많이 남긴 건 저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본래 지병이 있으니, 지금 병 치료를 핑계 삼아 건업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러면 관우가 안심하고 수비 병력을 모두 북쪽으로 불러들일 것입니다. 그 사이 장강을 따라 배와 말을 타고 습격한다면 남군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손권은 그 의견이 좋다고 생각해 일부러 떠들썩하게 소문을 내면서 여몽을 건업으로 불러들입니다. 때마침 조조가 자신과 손잡자고 사자를 보내기도 했겠다, 그는 이참에 유비와 아예 손을 끊기로 작정합니다. 


  그리고 여몽은 자신을 대신해 형주에 파견할 자로 육손을 추천합니다.


  육손은 백면서생 같은 이미지가 있지만 사실 나이가 적지 않았습니다. 183년생으로 당시 서른일곱 살이었으며 제갈량보다 두 살 어렸고 여몽과는 다섯 살 차이에 불과했지요. 스물한 살에 손권 휘하에 들어 벼슬을 시작했는데 주로 지방의 반란군과 도적떼를 토벌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여러 번 공을 세운 바 있습니다. 육씨 일가를 회유하고자 했던 손권은 죽은 형 손책의 딸을 육손과 혼인시켰는데, 그 손책이 과거 육씨 일족의 대표 격이었던 육강을 공격해 죽였던 적이 있던 걸 생각하면 꽤나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육손은 여몽이 병을 칭해 건업으로 돌아오자 그와 만나 관우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육손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된 여몽은 그를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하고, 손권은 그를 편장군 우부독으로 삼아 육구로 보냅니다. 육손은 육구로 가자마자 관우에게 편지를 쓰는데 그 태도가 실로 공손하다 못해 비굴해 보이기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그대가 법도에 따라 군대를 지휘하여 적을 격파한 공로는 실로 위대합니다. 동맹국으로서 기쁘고도 이로운 일이기에 그 소식을 듣고 박수를 칠 정도였습니다. 대업을 이루어 함께 조정을 받들게 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저는 보잘것없는 선비로 어쩌다 서쪽으로 오게 되었는데, 오직 그대의 풍채를 앙모하면서 삼가 가르침을 청할 따름입니다.” 


  게다가 관우가 우금을 격파했다는 소식을 듣자 또다시 편지를 보내는데, 얼마나 낯 뜨거운 칭송으로 가득한지 차마 따라 적기가 민망할 정도입니다. 물론 관우를 방심하게 하려는 속임수였죠.


  한편 관우는 병력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비록 우금은 격파했지만 조조가 추가로 병력을 보내오기 전에 양양과 번을 점령하는 것이 지상과제였죠. 그런 상황에서 위협적인 적수로 여겼던 여몽이 돌아가고, 그 후임으로 온 자는 자신에게 굽실거리며 알랑방귀를 뀌어 댑니다. 관우는 이제 안심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강릉과 공안에 배치한 병력을 북쪽으로 오게 합니다. 여몽의 계책대로였지요. 

 



   [2. 미방과 사인의 배신]


  이때 유비가 점유한 형주의 영역은 대략 남군, 무릉군, 영릉군 세 개 군이었는데(맹달이 태수로 임명된 의도군은 남군에서 갈라져 나왔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곳은 단연 남군 강릉현과 무릉군 공안현이었지요. 관우는 강릉에는 남군태수 미방을, 공안에는 장군 사인을 배치했습니다.


  미방은 서주에서부터 형 미축과 함께 유비를 따른 자였습니다. 미씨 집안의 엄청난 재력(財力)을 바탕으로 유비를 후원했으며 동시에 유비의 처남이기도 했지요. 유비가 그를 믿고 남군태수로 삼아 형주의 실질적인 이인자로 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인은 부사인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그전까지 활약이 기록으로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만 이때 장군직에 올라 있었고 또한 북쪽 유주(幽州) 출신이란 점에서 아마도 초창기부터 유비를 따랐던 무장으로 보입니다. 공안을 수비하도록 했을 정도면 능력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관우가 평소 이 두 사람을 업신여기면서 불화가 있었던 것이죠. 관우는 결코 원만한 성격이 못 되었습니다. 자신이 인정한 사람에게는 정중하면서도 공손했지만, 반대로 자신이 인정하지 못하는 자는 업신여기고 깔보기 일쑤였죠. 문제는 그 커트라인이 상당히 높았다는 점입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 사람 대다수가 그의 눈 아래에 있었지요. 


  아예 힘없는 백성들이나 무명소졸들은 오히려 괜찮았습니다. 관우에게 있어 그들은 ‘돌보아야 할’ 대상이었고, 그는 평생 사졸들에게 너그러운 상관이자 백성들을 아꼈던 목민관이었습니다. 문제는 사대부들이었지요. 관우는 자신의 동료나 부하였던 사대부들에게 오만한 태도를 보이기 일쑤였습니다. 게다가 워낙 솔직하고 직설적인 데다 자부심 넘치는 성격이 사람들과의 불화(不和)를 부채질했지요. 


  이런 상황에서 미방이 사고까지 쳐 버립니다. 실수로 강릉에 불이 나서 군수물자들이 다수 불타버린 것이죠. 미방과 사인은 후방에서 관우에게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보급에 차질이 생겨 버리고 맙니다. 그렇잖아도 마음이 조급했던 관우는 격분하여 두 사람을 질책하면서, 돌아가면 그 죄를 다스리겠다고 말하죠. 그러니 미방과 사인은 불안해하면서 동시에 불만이 가득 차게 됩니다. 


  손권은 이 틈을 노렸습니다. 그는 은근히 밀서를 보내 미방과 사인 두 사람을 꼬드깁니다. 문제는 이 두 사람이 그걸 덥석 받아들였다는 겁니다. 물론 상황이 관우에게 불리하긴 했지요. 조조와 손권이 손을 잡았다면 관우의 운명은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관우와 트러블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명색이 공신(功臣)이자 인척이었던 미방과 오랜 부하였던 사인이 그렇게까지 손쉽게 저쪽으로 넘어가 버리다니 말입니다. 그렇기에 관우의 용인(用人)술에 대해서는 도저히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없게 되면서도, 동시에 미방과 사인의 막장성에 대해서도 분노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일입니다. 관우의 후방은 그런 식으로 너무나도 손쉽게 붕괴되고 있었습니다. 




   [3. 맹달과 유봉의 한심한 짓]


  그러나 관우에게도 믿는 구석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상용에 맹달과 유봉이 이끄는 군사들이 있었지요. 맹달의 병사들이야 원래 형주 것이라 쳐도, 유봉의 병력은 한중에서 내려온 추가 병력이었습니다. 게다가 항복한 신탐과 신의가 원래부터 거느리고 있던 군대도 있었습니다. 저는 당시 상용에 있었던 병력이 거의 만 명에 육박했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그 병력이 양양으로 내려온다면 관우에게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격이었죠. 상용과 양양은 강으로 이어져 있어 배를 동원한다면 신속하게 합류도 가능합니다. 관우는 그들에게 몇 번이나 사람을 보내 자신을 도우라고 독촉합니다. 


  그런데 맹달과 유봉은 관우를 돕지 않습니다. 명목상의 이유는 상용이 종속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쉽사리 군사들을 이동시키기 어려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기도 했지요. 원래 상용은 외진 곳이라 대대손손 살아온 호족인 신씨 형제들이 실질적으로 왕 노릇을 하던 곳이었거든요. 비록 지금은 항복해 왔지만 다시 배반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맹달과 유봉이 관우를 돕지 않았던 진정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싸우면서 화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유봉이 맹달의 군악대를 빼앗아 가기까지 했지요. 


   ....... 애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국가의 큰일을 눈앞에 두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인가 싶습니다만 이게 현실이었습니다. 아마도 왕의 양아들이자 어려서부터 공을 세운 야심 찬 젊은 장수와, 정략에 능한 명사(名士)인 맹달 두 사람은 애당초 화합하기 힘들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좀 더 파고들어 보자면 애당초 두 사람 간의 지위고하를 확실하게 해 놓지 않은 유비에게도 일정 부분 잘못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이러한 이유로 결국 맹달과 유봉은 관우의 분투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기만 합니다. 


 


   [4. 유비의 성도 귀환]


   그러면 유비는 대체 왜 성도로 돌아간 것일까요? 유비가 한동안 한중에 머무르면서 조조를 견제했다면 조조 또한 쉽사리 동쪽으로 가지 못했을 것이고, 그러면 관우가 좀 더 여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여기에 대한 해답으로 저는 네 가지 추측을 제시해 볼까 합니다. 첫째는 방금 전에 언급한 상용의 병력입니다. 여차하면 유봉과 맹달의 병력으로 관우를 도울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겠지요. 어차피 익주 본토에 남은 병력은 전무하다시피 한 수준이었기에 상용의 병력이 동원 가능한 유일한 전력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관우가 유봉과 맹달을 불렀다는 기록에서 미루어볼 때, 관우에게는 그들을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습니다. 그 정도면 유비도 할 만큼은 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리고 둘째는 내부의 사정입니다. 이건 당시 시대상황과도 직결되어 있지요. 당시는 반란이 거의 일상사였던 시절이었습니다. 사백 년간 이어져 온 한나라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중앙권력이 장악력을 잃자 여러 지역별로 크고 작은 세력들이 군벌화 된 시기입니다. 지역마다 오래도록 뿌리박고 살아온 대가문(大姓)들이 이른바 호족(豪族)화되어 사병을 거느리며 영향력을 행사했고 심지어 중앙정부에서 임명된 지방관들도 독립 세력을 형성하여 서로 치고받았습니다. 전쟁이 일상화되다 보니 자연스레 백성들에게는 가혹한 수탈과 징병이 이루어졌고, 군대에 끌려가 개죽음당하기 싫었던 백성들은 산으로 도망쳐서 도적(賊)이 되는데 크게는 그 무리의 크기가 십만 명 단위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종종 무력에 의해 토벌되었으나 틈만 나면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다시 일어나곤 했습니다. 즉 천하에서 사시사철 반란군과 도적떼가 발호하던 시절이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랬기에 유비는 오래도록 수도를 비워둘 수 없었습니다. 당장 익주부터가 본인이 유장으로부터 빼앗은 지 5년밖에 되지 않은 곳이어서 민심이 안정되어 있지 않았거니와, 수도인 성도 근처는 그럭저럭 괜찮지만 남쪽으로 내려가면 여러 대가문들과 이민족들까지 뒤섞여 있어서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많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전쟁을 치르느라 1년씩 자리를 비웠으니 반란이 얼마나 들끓었겠습니까. 일단 조조를 물리친 이상, 유비는 한시바삐 돌아가 익주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셋째는 현대와는 전혀 다른 당시의 통신 체계입니다. 당시 형주 공방전은 변화무쌍하게 진행되면서 몇 번이나 반전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형주의 상황이 유비에게 전해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요즘처럼 무선통신이 있었다면 유비도 관우의 상황에 맞춰서 즉각 대응할 수 있었겠지만, 당시는 간단한 명령 한 통을 전달하기 위해서도 사람이 말과 배를 번갈아 타면서 십 수 일을 이동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필연적으로 익주와 형주의 움직임 사이에 많은 간극이 발생하고 말았던 것이죠. 그것이 유비가 관우를 제대로 지원하지 못했던 큰 원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유비의 의도와 관우의 행동 간의 차이입니다. 유비가 조조를 견제하고자 하는 의미로 양번 공격을 명령했으리란 추측은 앞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리고 유비가 한중에서 조조를 퇴각시킴으로써 그 전략적 목적은 달성되었죠. 그런데 본래 견제 정도의 의미였건만 조인을 포위하고 우금을 박살 내는 등 관우의 성과가 기대 이상으로 엄청났단 말이지요. 그러자 관우는 내친김에 크게 공을 세워보자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어쩌면 그간 겪어 왔던 많은 굴욕을 한꺼번에 설욕할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요. 원래대로라면 유비가 성도로 돌아오는 타이밍에 관우도 돌아와야 했지만 관우가 그리 하지 않았던 것, 이후로도 끝내 양번 함락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추측의 영역일 뿐이지만요. 

 



   [5. 3만 명의 포로]


  우금을 격파한 관우는 삼만 명에 달하는 포로를 사로잡습니다. 그런데 이 포로들을 먹여 살리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선택은 이쯤에서 만족하고 강릉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서 포로들을 무릉이나 영릉 등 후방으로 보내어 호구(戶口)를 늘리거나 혹은 병력으로 활용하였다면 관우의 형주 세력은 훨씬 강해졌을 겁니다. 


  그러나 관우가 원한 것은 양번의 함락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포로 3만 명은, 실로 엄청난 이득이자 미래의 큰 재산이었지만 지금 당장은 골칫거리일 뿐이었죠. 저 정도 규모의 포로들을 감시하려면 적어도 수천 단위의 병력을 배치해야 할 겁니다. 그렇잖아도 병력이 부족한데 말이죠. 그들을 먹이고 입히려면 그만큼 물자가 필요합니다. 그렇잖아도 미방과 사인이 보급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죠. 그렇다고 죽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건 서주 대학살을 자행한 조조에 대항하여 일어난 유비의 정치적 입지를 뿌리째 뒤흔들어 버리는 행위였을 테니까요. 


  결국 곤란에 빠진 관우는 상관(湘關)의 양곡을 가져갑니다. 상관은 말하자면 유비와 손권 사이의 공동경비구역 JSA 같은 곳으로 보입니다. 두 세력 간의 경계에 위치하면서 상인의 왕래를 관할하는 등의 역할을 했지요. 그런데 이곳에 있었던 양곡, 아마도 손권의 소유였거나 혹은 공동 소유였던 것으로 보이는 양곡을 관우가 멋대로 가져가 버립니다. 포로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요. 손권은 분노하여 관우를 공격하기로 합니다. 


  혹자는 이 상관의 쌀을 가져간 사건을 두고 잘잘못을 가리고자 설왕설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실 이건 부차적인 문제였어요. 물론 이 행위는 부정하지 못할 관우의 잘못입니다. 그러나 설령 관우가 그 쌀을 가져가지 않았더라도 손권은 반드시 관우를 공격했을 겁니다. 즉 이 사건은 하나의 명분이었을 뿐이지요. 손권은 처음부터 관우의 뒤통수를 치려고 했고 결국 실행에 옮겼습니다.  


 


   [6. 조조의 전력 동원]


   그리고 장안으로 돌아온 조조는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형주로 투입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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